Tue, Jun 30,
2015 at 2:55 AM
연속재난과 국가위기관리 능력
세월호 사고의 수습이 채 마무리되지 않은 시점에 갑자기 발생한 메르스 사태로 나라가 휘청거렸다. 1만5천 명이 넘는 국민이 격리되고 수만 명의 의료진과 공무원이 총동원되어 대응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30명 이상 사망하고 아직 수십 명이 투병중이다. 이로 인해 국민생활이 불안과 불편을 크게 겪었으며, 관광과 내수의 위축으로 야기된 경제적 손실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한 경제연구기관은 메르스 사태의 경제손실 규모가 20조원 이상이며 GDP성장은 1%포인트 이상 감소될 것으로 보았다. 경기도에서 지난 한달 동안에만 지역경제 손실이 8천억 원에 달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여 정부는 국채발행 등을 통해 15조원 이상 규모의 추경예산을 편성하여 경제가 입은 손실을 만회하고자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국민과 약속한 공약사항을 제대로 이행할 사이도 없이 작년과 올해 꼬리를 물고 발생하는 대형 국가재난 수습에 허둥대며 임기 절반을 보내고 있다. 대통령의 국정운영 능력에 대한 일각의 문제 제기가 따가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국가재난에 대한 책임이 대통령에게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일 수 있다. 메르스 사태는 방역실무자들이 초기대응에 실패했고, 세월호 사고는 안전구조 현장에서의 초동대응 미숙이 발단이 되었다. 이러한 것은 분명히 해당 실무선에 책임을 물을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초기대응 실패 이후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우물쭈물 결단의 시기를 놓치거나 우왕좌왕하면서 대응 역량의 혼선을 초래하고 재난을 키우며 사태를 악화시킨데 있다. 실무선에서 초기대응에 실패했어도 수습과정에서 국가위기관리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국가적 규모의 재난으로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따라서 세월호 사고와 메르스 사태를 겪으며 정부의 대응과 처리 과정을 지켜본 국민들은 국가위기관리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국정최고책임자로서 무한책임을 지는 대통령을 쳐다볼 수밖에 없다.
어떤 이유로든 앞으로도 계속 각종 대형사건·사고가 발생할 것이고 전염병 바이러스도 나올 것이며, 우리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위기적 상황도 나타날 수 있다. 사건·사고나 위기사태 자체의 발생을 완벽하게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국가위기관리 시스템이 부실하다면 어느 분야든 현장의 사소한 초기대응 실패가 국가규모 재난으로 또 번질 수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박근혜 정부가 보여준 국가위기관리 능력을 생각하면 통일이라는 엄청난 과제 – 안보는 물론 정치, 외교, 경제 각 분야에 복합적 위기 요소를 내포한 초대형 과제– 를 주도하거나 준비할 능력은 고사하고, 우발적 무력충돌 가능성 등 돌발 위기 요소가 산재한 남북관계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현안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민주주의와 헌법질서의 위기, 그리고 통일준비
시험당하고 있는 것은 돌발 재난에 대한 국가위기관리 능력만이 아니다. 민주주의와 헌법질서를 수호할 능력이 우리 국민에게 있는지도 연달아 시험받고 있다.
최근 메르스 사태가 아직 진정국면으로 통제되지 못한 상황에서, 대통령은 여야 합의로 처리한 법률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여당 원내대표의 사퇴를 정면으로 압박하고 나서 정치권에는 큰 충격을 주었고 국민에게는 큰 걱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대통령이 거부한 국회법 개정 법률에 위헌성이 있네, 없네 하는 문제는 정파적 이해관계와 맞물려 시비가 모호하게 되어 버렸지만, 이 법을 당이 당론으로 통과시킨 과정과 관련하여, 평당원일 뿐인 대통령이 선출직 원내대표에게 ‘배신’ 운운하며 사퇴하라고 하는 것은 민주주의 어느 원리에 근거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더욱 황당한 것은 당소속 의원 대다수가 찬성한 법률안에 대해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입장을 바꾸고 이를 폐기시키고자 하는 여당의 처지다. 청와대의 시녀라는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된 입장에서 앞으로 여당이 야당의 협상상대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겠는지,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수렴하고 행정부를 견제해 나갈 수 있겠는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민주주의 질서나 절차에 대한 논란처럼 포장은 되어 있으나, 속을 들여다보면 결국은 당권과 관련된 갈등이라는 것은 국민 모두 알고 있다. 내년도 총선 공천권을 둘러싼 기득권 싸움이 당권 갈등을 부추기고 있으며, 당청 갈등도 그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혁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야당의 당내 갈등도 매한가지다.
메르스 사태로 인한 국가위기 국면에서도 정치권과 언론은 정파적 관점에 입각해서 사태를 부풀리기도 하고 축소하기도 하였다. 매사를 정치적 이해득실에서 해석하고 행동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갈수록 그 정도가 지나치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인신공격이나 흑색선전이 난무한지는 오래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이 국정원과 국군 댓글부대의 동원으로 부활하고, 국가기밀문서를 왜곡하여 선거유세에 이용한 것이 얼마 전 재판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렇게 민주주의와 헌법질서를 흔드는 사건들이 점점 치열해지는 정파적 싸움에 가려져 둔감해지는 것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통해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든 선배들에 대한 배신이며 장차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미래 역량을 축내는 행위라고 본다. 이 땅에 민주주의와 헌법질서를 튼튼하게 뿌리내리는 것은 우리가 남북관계를 주도하고 한반도 통일을 끌어내는 명분과 역량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통일준비는 통일비용을 어떻게 조달하고 분담할 것인가의 경제문제로만 귀결되지 않는다. 과연 그것은 우리가 한반도 통일이라는 엄청나게 복잡한 과제를 다루면서 정파적 싸움에 휘둘리지 않고 민주주의와 헌법질서를 관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 점에서 현재 겪고 있는 민주주의와 헌법질서의 위기는 우리의 통일준비 역량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남북관계 단절의 장기화와 한반도 위기관리
분단 70주년을 앞두고 이명박 정부 이래의 남북관계 단절상황이 7년 이상 이어지고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으로 남북관계 개선에의 기대가 잠시 높아지고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드레스덴 구상’ 등이 제시되었지만 아직 실천적 조치로 구체화된 것은 없다. 대통령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결단도 없었고 반대로 특별히 대북강경 조치를 내놓은 것도 없다. 그저 북한의 개과천선만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 사업의 토목공사나 되는 것처럼 남북관계에서도 효과보다는 부작용이 많은 5.24 조치를 밀어붙여 문제를 만들었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행동해야 할 때 우물쭈물 시기를 놓치는 것이 문제로 보인다.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에서 본 것처럼 제 때에 대처하지 못하고 정부의 허술한 위기관리 능력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두 사건이 우리 사회에 준 충격이 크고 앞으로도 적지 않은 후유증을 남기겠지만, 훨씬 더 심각한 민족적 재앙을 몰고 올 것은 두 말할 것이 없다.
남북관계 중단이 장기화됨에 따라, 우리는 한반도 긴장고조에 따른 안보비용 부담이 늘고 대주변국 외교에 있어서 북한카드의 상실로 인해 레버리지가 약화되어 외교비용이 증가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장기적 성장 동력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서 남북경협과 유라시아경협의 기회비용도 놓치고 있다. 남북관계를 단절시키는 강경조치를 오래 동안 유지했지만 북한의 도발 자세는 여전하고, 이 기간 동안 북한의 핵무기 능력은 오히려 강화되었으며, 북한 인권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북한도 힘들겠지만 우리의 안보적, 외교적 비용과 손실되는 경제적 기회비용은 증기하고 있다. 미국,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 모두 강 건너 불구경 하는 입장이며 오히려 한반도 분단과 남북갈등 상황을 각자의 국익을 도모하는데 이용할 뿐이다. 남북관계 개선도, 북한 핵문제 해결도, 북한 인권 개선도 우리가 직접 개입하여 문제를 풀지 않으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이 고착화되어 우리에게 더욱 어려워지기 전에 행동에 나서야 한다. 북한이 천안함 문제 등에 대해 사과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거나, 북한체제가 붕괴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생각으로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그것은 남북관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안되어 있거나 헌법이 요구하는 국가책무를 외면하는 태도라고 할 것이다.
북한에 대한 사과요구를 포기하라거나 북한의 붕괴가능성에 대한 비상대비를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북한의 사과나 붕괴에 매달리면서 현안을 외면하거나 기회비용을 날리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최근 우리 정부는 대일관계에 있어 일본으로부터 사과를 받는 문제와 다른 현안들을 분리 추진하기로 하고 그동안 냉랭했던 관계를 접고 한일관계를 새 출발시켰다.
남북관계에서도 이러한 분리 추진을 취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대한민국의 발전과 통일한국의 미래를 내다보며 감정적 차원을 걷어내고 실용적 접근을 해야 할 때다. 이런 점에서 6월15일 북한 정부가 성명을 내고 “당국간 대화와 협상을 개최하지 못할 것 없다”고 밝힌 사실을 그냥 흘려보내선 안 될 것이다. 북한의 의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단 장을 열어야 한다. 장이 서야 흥정도 가능하고 원하는 것도 얻을 수 있다. 최근 통일부장관이 북한 정부의 6.15 성명에 대해 일부 긍정적 입장을 보인 것은 고무적이다.
이번 메르스 사태는 사후 수습이라도 잘 되었으면 한다. 다시는 국민의 안전이 위협받는 일이 없도록 확실한 대처 시스템을 구축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나아가 남북관계도 메르스 사태의 재판이 되지 않도록 예비 경고를 신중하게 받아들여 체계를 재구축해야 하며, 그래야만 복구할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지 않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도 우리 정부의 국가위기 관리능력이나 우리 국민의 민주주의와 헌법질서 수호능력을 튼튼하게 다져나가야 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