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9.6 (오전) 제1차 통일의병대회 제1부
희망플래너 글 |
2015.09.07 22:34:32 올림
왜 우리가 지금 이곳에 이렇게 모였느냐? 남북의 긴장이 완화되고 갈등이 해소되어 서로 화해 협력해서 평화를 유지하자는 평화 발원 기도를 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나아가 평화를 넘어서서 남북이 통일을 하자는 통일 발원 기도를 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고자 우리가 이곳에 모인 것입니다.
6세기 전까지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친 작은 부족국가였어요. 그런 작은 나라였는데 신라의 국력이 갑자기 비약적으로 증대된 것은 신라와 가야가 통합을 한 덕분입니다. 통합을 어떻게 했느냐 하면 합의 통합을 했습니다. 둘이 서로 의논해서 통합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신라와 가야는 이웃 나라지만 친하기는커녕 원래 철천지원수였습니다. 서로 경쟁하는 적대 관계였고 통합 100여년 전에는 가야가 신라를 침공해서 신라가 멸망할 뻔한 것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구원병을 보내 겨우 살아난 원한이 있는 역사를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신라의 국력이 점점 커지고 가야의 국력이 약해졌을 때 신라가 가야를 침공했다면 가야는 죽기살기로 저항했을 것이고, 결국 가야를 무력으로 복속시켜 신라가 영토는 넓어졌을지는 몰라도 통일을 통해 이득을 얻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인명과 재산의 큰 손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후에도 또 가야 부흥운동을 한다고 반란을 일으키면 굉장히 사회가 혼란스럽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신라는 가야와 합의 통일을 했어요. 합의 통일이라는 게 말은 좋지만 쉽지 않습니다. 합의 통일을 할 때 신라가 강하고 가야가 약하니까 신라가 중심이 되어 가야를 흡수 통일 할 수 있겠죠. 이러면 가야가 끝까지 저항을 하겠지요? 저항을 하지 않도록 하려면 신라 쪽에서 가야에게 엄청난 양보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강자가 양보하는 것을 포용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포용을 했느냐? 두 가지 어려운 결단을 내렸습니다. 첫째, 가야는 나라가 생길 때부터 불교국가였어요. 그러나 신라는 불교를 철저히 탄압하는 국가였어요. 요즘 말로 하면 북한은 공산 국가이고 남한은 반공 국가라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신라가 불교를 공인했습니다. 우리가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공산당 활동을 합법화해준 셈입니다. 이건 독일의 예도 그래요. 통일하기 전에 이미 서독은 공산당 활동을 합법화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서독 안에서 공산당이 합법적으로 의회에 진출해 있었어요. 이렇게 해서 가야 사람들에게 통일 이후에도 자신의 신앙과 사상을 지킬 수 있도록 허용해 준 것이 첫 번째 큰 결단입니다.
두 번째로는 가야의 귀족을 신라의 귀족으로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당시는 신분사회니까 전쟁에 지면 왕이라 해도 노예로 팔려가요. 그런데 가야의 왕족을 신라의 왕족으로, 가야의 귀족을 신라의 귀족으로 신분을 그대로 인정해주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설명하면 북한에서 별 두 개짜리 사단장이면 통일코리아 안에서도 북한 장군이 통일 한국 군대의 장군이 되고, 북한 출신도 자기만 똑똑하면 장관도 대통령도 될 수 있도록 다 열어준 거예요. 지금 서독의 메르켈 수상도 동독 출신이에요. 정치적으로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인정해준 겁니다. 가야의 왕족을 신라의 왕족으로, 가야의 귀족을 신라의 귀족으로 아무런 차이 없이 인정해준 신분 보장 정책을 취한 겁니다.
이럴 때 신라 안에서도 반대가 많았어요. 신라 안의 기득권 세력이 엄청나게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신라의 젊은이들이 ‘아니다. 가야와 통합하려면 가야의 신앙을 인정하고 우리가 먼저 문을 열어야 한다.’ 이렇게 불교를 공인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보수 세력은 ‘무슨 소리냐, 150년이나 금지해온 불교를 어찌 공인할 수 있느냐?’ 고 맞섰어요. 그러는 중에 젊은이들이 흥륜사라고 하는 절을 지었어요. 법으로는 아직 금지되어 있고 논쟁이 되고 있는 중에 절을 지으니까,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보수세력들이 전부 일어나서 ‘왕이 국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저런 사태를 방치한다’고 난리가 났어요. 그 사건에 주범으로 지목된 사람이 이차돈이었습니다. 이차돈은 당시 왕궁의 서기관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행정관 정도 되는, 왕의 비서였습니다.
왕은 지금이라도 앞으로 불교를 믿지 않겠다고 하면 죄를 묻지 않겠노라 했는데 이차돈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꼭 필요하다, 이를 공인하지 않으면 신라의 발전은 없다’고 왕을 설득했어요. 왕은 그 말을 이해했지만 대신들이 정치적으로 엄청난 반대를 했기 때문에 그걸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법대로 이차돈을 사형에 처하게 되었어요. 그때 흰 피가 솟구치고 이차돈의 목이 하늘로 날아가서 저기 보이는 소금강산에 떨어졌다고 해요. 그 자리에 가보면 백률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라 안의 여론이 뒤집혔어요. 그래서 보수세력이 후퇴하고 불교를 공인하자는 젊은이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어요. 이차돈이 527년에 죽고 1년이 지난 528년에 신라가 불교를 공인했어요. 그리고 4년 후인 532년에 가야와 통합을 이루었습니다. 신라가 가야를 포용할 준비가 된 것이 확인되니까 가야가 신라와의 통합을 승인한 거예요.
이때 가야 안에서도 반대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북한을 포용하자고 하면 남쪽에서도 반대가 있겠지만 거꾸로 북쪽의 지도층 중에도 자기 체제를 지키려 하는 강력한 반대 세력이 있겠죠. 그런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 결정을 찬성한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무덤을 여기 쓰지 않고 산청에 썼대요. 신라에 귀순했으면 죽어서 무덤도 이곳 경주에 써야 하는데 그리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무덤에는 잔디가 안 산대요. 이것은 정치적으로는 좋은 결정을 했을지 몰라도 조상님에게는 면목이 없다 하여 그렇답니다. 찬성한 사람도 이렇게 어려움이 있었어요. 신라가 고려에 통합될 때도 경순왕이 통합을 승인했지만 마의 태자는 끝까지 반대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쪽은 절대로 통합은 안 된다고 하고, 또 다른 한쪽은 절대로 저들을 포용할 수 없다고 서로 맞서면 결국은 전쟁밖에 길이 없잖아요. 그런데 신라는 가야를 포용했고 가야는 그것을 받아들여서 합의 통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1 더하기 1이 2가 되는 통일이 아니라 5가 되고 10이 되는 통일이 되지요. 이 통합 이후 신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했어요. 그래서 법흥왕 다음인 진흥왕 때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동해로 올라가서 함경남도 지역을 차지하고 그 다음에 대가야를 복속시켜서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여 큰 국가로 등장했습니다. 그게 합의 통일의 시너지 효과입니다.
이런 우리 역사의 경험을 우리는 북한과 통일을 할 때 참고해야 합니다. 현재의 국력이나 조건으로 볼 때 북한 중심으로 통일을 해야겠어요? 남한 중심으로 해야겠어요? 반반씩 섞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도 남한에 산다고 남한 중심으로 되면 좋겠어요? 하하하. (웃음)
그러려면 신라가 가야를 포용했듯이 남한 중심으로 하려면 우리가 그만큼 자신감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북한에게 그만한 포용력을 베풀어야 합니다. 신분을 보장해주고 정치활동까지 다 보장해줄 정도의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지금 보면 북한은 자기를 지키겠다는 게 강하고 남쪽은 북한을 포용할 의향이 없기 때문에 갈등이 심한 거예요. 우리는 이 신라와 가야의 통합 경험을 우선 본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신라는 넓어진 영토를 안정시켜나가면서 부강해졌습니다. 우리 남한도 옛날엔 가난했지만 지금 부강해졌지요? 그런데 세상사에는 다 장단점이 있어요. 신라가 강해지니까 부작용도 나타났습니다. 한강 유역은 원래 백제 땅이었어요. 장수왕이 빼앗아서 고구려 땅으로 삼았어요. 이후에 고구려가 약해진 틈을 타서 백제가 신라와 힘을 합쳐 다시 찾았는데, 신라가 다시 이것을 빼앗아버렸어요. 그러니 신라와 백제가 원수가 되었겠죠? 고구려와도 원수가 됐어요. 부강해진 건 좋았는데 백제와 고구려 모두와 원수가 되니까 백제도 힘을 추슬러서 성왕, 의자왕에 이르면서 다시 부흥을 이루었을 때 신라를 공격했어요. 고구려도 마찬가지예요.
이제 신라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어요. 북쪽에는 고구려, 서쪽에는 백제, 남동쪽으로는 일본이 위협하니까요. 그러니 이제 신라는 완전히 고립당한 처지가 되었어요. 이웃 나라들과 원한을 샀기 때문에 자칫하면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한 겁니다. 그래서 신라가 바다를 건너서 중국의 수나라에 도움을 요청한 겁니다. 그런데 수나라가 고구려를 쳤으나 실패해서 멸망하자 당나라가 천하를 통일했지요. 그래서 다시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때 신라의 왕은 진평왕의 뒤를 이은 선덕여왕이었고 이때 외교부 장관은 선덕여왕의 조카인 김춘추였어요. 김춘추가 당나라 왕인 당태종과 밀약을 맺지요. 두 나라가 힘을 합쳐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면 대동강 이남은 신라가 가진다고 서로 합의한 겁니다. 그래서 당태종이 645년에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양만춘과의 안시성 전투에서 패하고 결국은 침공에 실패합니다.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이 실패로 끝나니까 백제와 고구려는 더욱 더 태도가 강경해져서 신라를 침공했어요.
…
“그러나 신라가 제 힘으로 통일을 한 게 아니라 외세의 도움을 얻어 통일을 했기 때문에, 그것도 신라보다 강한 당나라와 협력했기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두 나라가 멸망하자 당나라가 그 땅에서 물러나지 않고 백제와 고구려를 다 차지한 거예요. 백제 땅에는 웅진도독부를 세워서 자기들이 통치하고, 고구려 땅에도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자기들이 통치했습니다. 신라는 당나라가 약속을 안 지킨다 해서 여러 번 항의했지만 당나라는 오히려 계림도독부를 설치하고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임명하면서 신라까지 위협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과 손을 잡고 대당 선전포고를 하고 당나라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신라를 한국이라 치면 당나라는 오늘날의 미국보다 더 큰 나라였어요. 한국이 아무리 지금 좀 잘 산다 해도 미국과 전쟁하면 이길 수가 없겠죠. 그런데 신라는 결국 당나라와 전쟁을 하게 되어 당나라의 침공을 받게 됩니다. 그때 신라 사람들은 이 당나라를 사람의 힘으로, 즉 현실의 국력으로 이기기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항복하자는 사람도 많았지만 끝까지 싸워서 우리의 자주권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이 더 많았어요.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니까 신의 힘을 빌리자고 해서 사천왕사지를 건립했어요. 그 사천왕사에서 신의 힘을 빌어서, 다시 말해 제석천과 사천왕의 힘을 빌어 당나라군을 물리치자고 한 것이 문두루 비법입니다. 그래서 사천왕사에서 문두루 비법을 행해서 당나라의 20만 군대가 서해에서 폭풍을 만나 전멸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했다고 합니다. 2년 뒤에 당나라는 다시 10만 군대를 이끌고 침공을 해왔는데 이 때에도 역시 폭풍을 만나서 파선함으로써 신라는 위기를 극복했다고 합니다.
그 뒤로도 당나라는 크고 작은 침공을 계속 했지만 결정적으로는 육지전에서는 매소성 전투에서, 바다에서는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함으로써 해서 당나라는 신라 침공의 야욕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676년에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기고 당나라와 신라는 다시 화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660년에 백제가 망하고 668년에 고구려가 망했으면 668년을 삼국통일의 해라고 불러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이 땅을 당나라 군대가 지배했지 신라가 통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당 전쟁을 8 년간 벌여서 676년에 당나라가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기면서야 결국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
실패했던 독립운동, 그 선배들의 뜻을 이어받아서 우리가 온 힘을 다해서 통일만큼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야 통일된 국가가 자주적인 독립 국가가 될 수 있습니다.
용성진종조사님께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다가 독립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공덕이 부족하다, 공덕을 쌓아라 해서 10가지 유훈을 남기셨어요. 이 공덕을 쌓게 되면 앞으로 800년간 대한민국이 번영할 거라고 했습니다. 나라 이름도 정해주셨어요. 신라, 고구려, 백제 모두의 뜻을 하나로 모아야 된다고 해서 나제려 대국이에요. 공덕을 쌓으면 앞으로 나제려 대국이 800년간 번영할 거라는 예언을 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