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입’, 손석희



내가 ‘과대포장’ 됐다면 실체 벌써 드러났겠죠”

이나리 동아일보 주간동아 기자 byeme@donga.com / 사진·김성남 기자







● 가난이 준 불안과 우울…“조울증 기 있었다”
● “이 학생 고집은 똥고집”…터프하고 강단 있던 소년
● MBC 전체 수석 입사, 4년 만에 ‘공정방송투쟁’ 얼굴로
● “차분하고 냉정하다는 평, 동의할 수 없다”
● “큰 영향력, 시사프로 진행에 오히려 해 될까 걱정”
● “나는 강퍅한 인간…방송 위해 스스로 담쌓고 산다”

“선배, 손석희씨 독감이라던데? 너무 심해서 ‘100분 토론’이랑 ‘시선집중’도 못했대요.”

‘주간동아’ 마감으로 한창 바쁜 금요일, 한 후배가 ‘아직 몰랐냐’는 투로 말했다. “내일 MBC 손석희(孫石熙·50) 아나운서국장과 2차 인터뷰를 할 예정”이란 말을 막 꺼낸 참이었다.

이런. 어깨 힘이 탁 풀렸다. 이틀 전 첫 인터뷰 말미에 그가 한 말이 있었다.

“이거 걱정되네. (인터뷰) 시작할 때보다 많이 안 좋아졌어요. 방송 못하게 되면 이 기자가 책임져야 돼요.”

안 그래도 인터뷰 내내 목캔디를 입에 달고 있던 그였다. 얘기가 길어지다 보니 그만 성대에 무리가 간 듯했다. 책임지라는 말이야 농담이겠지만 진짜 방송 펑크라니, 미안하기도 하고 낭패스럽기도 하고…. 어쨌거나 2차 인터뷰는 물 건너갔다 싶었다.
인터넷 검색부터 해봤다. 찾은 기사 제목은 이랬다. ‘손석희 연이어 결방한 까닭은?’ 내용인즉, ‘감기 탓이라지만 혹 ‘PD수첩’ 관련 보도 태도에 대한 네티즌의 공세 때문 아니냐’는 것이었다. 아닌게아니라 최근 손석희는 네티즌들로부터 전례 없는 공격을 받고 있는 터였다. MBC ‘PD수첩’의 황우석 서울대 교수 관련 보도 때문이었다.

물론 손석희 자신이야 그 보도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일부 네티즌은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 사이트로 몰려가 “‘PD수첩’이 잘못한 게 뻔한데 손석희는 왜 입 다물고 있느냐”며 비난을 퍼부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손석희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얼마나 확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일 수 있다. ‘제 식구’이건 아니건, 손석희는 바른 말, 해야 할 말은 꼭 하고야 마는 사람이란 믿음이 그것이다.

영향력·신뢰도 1위 언론인

손석희는 청취자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지난 12월6일, 그는 ‘시선집중’ 프로그램을 통해 “이 사안에 대해 균형 보도를 하고 싶었지만 황우석 교수 쪽에서 인터뷰에 응하지 않아 어려웠다”며 “PD수첩의 잘못된 취재방식은 변명의 여지가 없으나, 연구 자체와 관련한 논란에 대해선 황 교수가 직접 답해야 할 것”이란 견해를 밝혔다. 비난 여론이 또 한 번 비등했다. 일부 언론이 그의 ‘부재(不在)’를 보도하며 ‘PD수첩’ 건을 은근슬쩍 끼워넣은 것은 이 같은 저간의 사정 때문일 것이었다.

인터뷰는 물론 기사 작성이 끝난 12월15일, “줄기세포는 없다”는 노성일 미즈메디병원장의 폭탄선언이 터져나왔다.

어쨌거나 대단하지 않은가. 아나운서 한 명이 감기에 걸렸다, 부득이 방송 진행을 못하게 됐다. 그런데 이런저런 정치적 해석이 난무한다. 사람들은 현안에 대한 그의 생각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래서 한마디 하면 또 인터넷 세상이 들썩인다. 모모한 원로 정객 저리 가라요, 웬만한 신문 논설위원은 명함도 못 내밀게 생겼다. 하긴 그가 한 시사주간지 조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1위와 ‘가장 신뢰성 있는 언론인’ 1위를 차지한 것이 바로 요 얼마 전이다.
어쨌거나 지레 포기할 수는 없어 그에게 전화를 했다. 역시, 목소리가 정상이 아니다. 안 그래도 인터뷰 안 하기로 유명한 그가 어렵게 응한 자리였다. 더 못하겠다면 우길 재간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 “마저 해보자”는 답이 돌아왔다.

“지금 제가 인터뷰하고 그럴 때가 아닌데. 목도 목이지만 요즘 (MBC가) 이렇게 힘들어서….” 하지만 두 번 말하지는 않았다. ‘PD수첩’ 건이 터지기 전에 한 약속인 만큼 곤란해도 지켜야 한다고 판단한 듯했다. 말에 군더더기가 없는 것, ‘내 방송’만큼 ‘남의 기사’도 고려하는 것, 상황이 바뀌어도 약속대로 움직이는 것. 그는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사실 손석희와의 만남은 썩 기대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 스스로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터뷰어다. 무슨 말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 그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이도 드물 것이다. 게다가 ‘사생활과 정치 얘기는 안 한다’는 무언의 조건까지 달려 있는 참이었다. ‘거 참, 의욕 안 생기네’ 혼자 투덜대던 중 그 책, 아니 그 얼굴을 만났다. 그가 1993년 펴낸 에세이집 ‘풀종다리의 노래’(역사비평사) 표지에 실린 서른 대여섯 살 적 그의 모습이었다.

사진 속 그는 예뻤다. 귀엽고 깨끗했다. 여주인공을 설레게 하는 순정만화 속 이웃집 소년 같았다. 이렇게 예쁘던 남자가 쉰 살이 되면 어떤 얼굴을 갖게 되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자기 얼굴을 어떻게 책임지며 쉰 살이 됐는지 알고 싶었다. 비로소 여의도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MBC 사옥 6층, 아나운서국장실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이 학생 고집은 똥고집

인터넷에 떠도는 신조어 중 ‘미중년(美中年)’이라는 것이 있다. 그저 ‘잘생긴 중년 남성’을 일컫는 말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미중년의 조건은 네티즌들의 주장에 따르면 ‘품격 있는 따스함, 권위를 살짝 위반하는 귀여움, 자기만의 개성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섹시함’이다. 손석희, 그는 아쉽게도 미중년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귀엽지도, 따스해 뵈지도, 개성이 넘쳐 흐르는 듯 보이지도 않았다. 방송에서 보여지는 이미지와 실제의 그는 놀랍도록 비슷했다. 꿈꾸는 눈동자의 ‘미소년’은 유능하고 절제력 강한 ‘방송인’이 돼 있었다. 그런데 왠지 미련이 버려지질 않았다. 이를테면 햇빛 때문이었다.

내가 지켜 온 가장 오랜 기억은 햇빛에 대한 것이다. 널따란 신작로에 줄지어 늘어선 포플러 나무들, 그 나뭇잎들 사이로 부서지던 한낮의 햇빛, 끊어질 듯 말 듯 들려오던 골목길 안의 아이들 소리…. 그 때 나는 세 살쯤이었던가. 아스라하여 자꾸 도망가려는 그 기억의 끝자락을 가까스로 붙들어 세상에 대한 내 첫 기억으로 남겨 놓았다.’

그의 에세이집 첫 꼭지의 첫 문장이다. 또한 그는 한 인터뷰에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뜬 동료 정은임 아나운서에 대한 추억을 묻자, 다만 “몸집 작은 사람이 흰 눈밭을 또박또박 걸어가던 뒷모습”을 이야기했다. 모르긴 몰라도 정은임 아나운서의 정갈한 성품과 고독한 면모를 이처럼 정확히 묘파한 표현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를 어찌, 냉정하고 절제력 강한 방송인으로만 단정할 수 있겠는가. ‘딱 한 장의 그림’으로 한 사람과 한 시기, 한 세계를 인상지울 수 있는 직관력은 아무나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손석희는 서울 토박이다. 위로 누나 하나, 아래로 남동생 하나가 있다. 직업군인이던 아버지는 그가 여섯 살 때 군복을 벗었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가물었다. 아버지는 양수기 판매업에 뛰어들었다. 가진 돈 다 털고 자그마한 집까지 잡혀 양수기를 사들였다. 그걸 경기도 전곡 어딘가에 풀어놓았는데 이튿날 그만 큰물이 져 몽땅 떠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그는 “이후 우리 식구들의 삶은 그 양수기 사건처럼 극적인 데가 있었다”고 했다.
한번 자리잡은 가난은 쉬 떠나지 않았다. 집을 잃은 그의 가족은 중구 필동의 한 양철담장집에 세를 들었다. 거기서 그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보냈다.

“제가 고집이 좀 셌어요. 2학년 통지표에 ‘이 학생 고집은 똥고집’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니까. 또 제법 터프한 편이었는데, 근처 퇴계로 고아원에 살던 아이들이랑 주로 어울렸어요.”
단지 ‘비슷하게 어려운 처지’여서 그랬던 것만은 아니었다.

적산가옥에 사는 몇몇 아이를 빼곤 특별히 더 잘살 것도, 못살 것도 없는 살림이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시절, 그는 이런 동류의식이 소리없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됐다. 진원지는 새로 담임을 맡은 40대 여교사의 빈 커피병이었다.

담임선생님은 도시락 반찬을 싸오지 않았다. 대신 아이들 도시락에서 반찬을 적절히 ‘빼앗아’ 먹었다. 처음에는 빈 커피병 가득 김치를 거둬 먹고 남은 것은 싸 가지고 갔다. 열흘 후쯤부턴 도시락 뚜껑에다 다른 반찬들까지 담았다. 선생님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아이들의 도시락 반찬을 둘러본 다음 “누구, 누구, 누구는 도시락 들고 나와라. 선생님하고 같이 먹자”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의 3학년 시절 급우들은 ‘선생님 책상 앞에 거의 늘 불려 나가는 아이들과 가끔씩 불려 나가는 아이들, 전혀 나가보지 못한 아이들’로 세 동강이 났다. 그는 비로소 가난을 알았다. 그로 인한 설움과 자괴심, 억눌린 분노도 경험했다. 필동 시절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의 가족이 다음으로 옮겨간 곳은 성북구 보문동이었다.
“거기 애들은 아주 조용하고 얌전하더군요. 저도 덩달아 그런 아이가 됐죠.”

6학년 때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보문동 안에서도 몇 번 이사를 다닌 끝이었다. 온 가족이 저녁상을 물리고 며칠 전 마련한 TV 앞에 둘러앉아 있는데 천장에서 작은 흙덩이 몇 개가 후두둑 떨어졌다. 전날부터 내린 비 때문인 듯했다. 날림으로 지은 한옥에서 빗물 새는 것쯤은 예사여서 처음엔 식구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지는 흙의 양이 점점 많아졌다. 어머니가 문득 말했다. “이러다 집 무너지는 거 아닐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안방에 있던 가재도구를 마루로 옮기기 시작했다. 담요로 장롱을 덮고 다음날 입을 옷가지를 챙겨 나온 직후, 굉음이 터져나왔다. 거짓말처럼 정말, 천장이 무너졌다. 다음날 아침 인부들을 불러 쏟아진 흙더미를 한참 파헤친 뒤에야 안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거기서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을 봤다. 천장이 있어야 할 그곳에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있었다”고 했다.

손석희는 이른바 ‘7·15 해방’ 세대다. 입시가 아닌 추첨을 통해 중학교에 입학한 첫 세대라는 뜻이다. 그는 우이동에 있는 서라벌중학교에 배정 받았다.

그즈음 안암동으로 이사한 그는 미아리고개 너머 학교까지 버스 예닐곱 정거장 길을 꼬박 걸어 다녔다. 차비 모으기에 재미가 들린 탓도 있었지만, 사실 더 좋았던 건 걷는 일 그 자체였다. 그는 자신의 책에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던 세상에 대한 내 사념의 방식도 그 혼자만의 오롯한 통학길에서 상당부분 연마됐을 것’이라 적고 있다.

자존심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3년을 걸어다니며 채운 두 개의 저금통을 깬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조립식 전축 한 대와 레코드 두 장을 샀다. 거쉰의 ‘랩소디 인 블루’, 만토바니의 영화음악집이었다. 그는 “결혼해 새 전축을 들여놓기까지 15년 가까운 세월을 그 전축과 함께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클래식 음악을 즐기지 않는다. 음악회도 가지 않는다. “거기서 내가 만들어내야 할 가식적 분위기가 싫기 때문”이란다. 비슷한 맥락에서 그는 정중한 언변으로 무장한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글쎄 뭐랄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 스타일을) 즐긴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명문고 입학’을 지상 과제로 내건 학교의 교육방침 때문에 그의 중학교 시절은 숨이 막혔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감내했다. 1학년 땐가 마침 교감 아들인 친구녀석 하나와 국기게양대 꼭대기에 교모를 걸어놓은 것이 일탈이라면 유일한 일탈이었다. “다음날 아침 미아리고개를 넘어가는데 저 멀리 그 모자가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죠.”

그렇다 해서 그가 호락호락한 학생이었던 것은 아니다.
“중학교 때 물상 선생님이 절 미워했어요. 이유? 모르죠. 그냥 주는 거 없이 미운 사람도 있으니까. 3학년 때였는데, 수업시간 중 옆자리 친구에게 ‘관성의 법칙이 뭐냐’고 묻다 딱 걸렸죠. 잡담했다는 이유로 아주 세게 야단을 맞았어요.”

그 주 일요일, 그는 아침 7시부터 자정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중학교 3년 물상교과서를 다 뗐어요. 밥도 가져다 달라 해서 먹었죠. 그러고 나니 점수가 대폭 오르더군요. 어린 나이였지만 자존심이란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를 깨닫는 계기가 됐죠.”
지금의 현대 계동사옥 자리에 있던 휘문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모 명문공립학교 입시에 낙방한 다음이었다. 입학식 후 며칠이 지나 그는 선배들에게 ‘찍혀’ 덜컥 방송반원이 됐다.
“선배들 따라 방송실에 가보니 먼저 끌려온 송승환(현 PMC프로덕션 대표)이가 저 뒷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더라구요.”
말이 방송반이지 시설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마이크가 고장 나 잭에 헤드폰을 꼽고 방송을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 때의 방송반 활동은 이후 그가 아나운서란 직업을 택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중학 시절 2, 3년간 제법 피는가 싶던 집안 살림은 그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다시 가파른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고교 신입생 시절, 그는 어머니와 함께 서대문구치소로 향했다. 부도를 내 구속기소된 아버지가 거기서 재판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아버지는 늘 삶의 준거가 돼 준 소중한 존재였다.

가난, 우울하고 불안한 무엇

‘…아버지는 당신 앞에 나를 불러 앉히시더니 내게 법(法)자를 한자로 써보라 하셨다. 물 수(水) 변에 갈 거(去), 물이 흐르는 이치대로 양심이 편한 쪽으로 행동하면 그것이 곧 법과 같다는 말씀이셨다.’ 그는 에세이집에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 한 토막을 이렇게 풀어놓고 있다.

그렇더라도 늘 가난에 옥죄인 생활은 우울하고 불안한 것이었다. 고교 2학년 당시 그들 가족은 보문동 산비탈에 있는 방 두칸에, 부엌이 딸린 집에 살았다. 그나마 방 하나는 홀로 남매를 키우는 아낙에게 세를 준 형편이었다.

"세 든 집 가장이 간첩 혐의로 사형당했다는 소릴 들었어요. 그 전까지만 해도 제법 잘 살아서, 열두세 살 먹은 딸내미는 화동(국내외 귀빈에게 꽃을 전달하는 어린이) 활동도 했다 그러더군요.”
어느 맑은 여름 오후였다. 그는 좁은 마당 한 귀퉁이에 있는 변소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문이라고 달린 것이 나무 판자 몇 개를 대충 얽어놓은 모양새여서, 판자 틈새로 바깥 풍경이 훤히 내다보였다.

“좀 있으려니 그 집 딸이 와 똑똑 문을 두드리더군요. 사람 있단 표시를 하자 문밖에서 가만히 기다렸어요. 그때 그 문틈으로 내다뵈던 슬픈 눈매, 아이 눈동자 속으로 흘러 들어가던 흰 뭉게구름이며 누추한 동네풍경을 잊을 수가 없어요.”

열여덟 소년이 아이의 눈에서 발견한 건 아마도 그 자신의 슬픔이었을 것이다.

“그랬겠죠. 그 무렵 식구들은 제게 ‘넌 조울증 기가 있다’는 말을 하곤 했어요. 이사가 워낙 잦고 생활도 부침이 많다 보니 일관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죠. 때문에 때론 너무 쉽게 포기하고 때론 지나치리만큼 뭔가에 집착하기도 했어요. 전 좌우명 같은 게 없지만 굳이 말하라면 ‘첫 마음을 지키자’라고 할까요. 환경에 휘둘렸던 기억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이쯤 얘기하고 보니 벌써 3시간이 지나 있었다. 2차 인터뷰를 약속하고 여의도를 빠져나왔다.

그를 두 번째로 만난 곳은 조용한 주택가의 한 커피숍이었다. 그는 모자부터 방한복까지, 그야말로 온몸을 둘둘 감은 채 약속 장소에 나와 있었다. 감기가 심한 줄은 알았지만 막상 그 모습을 보니 세게 물을 수도, 들을 수도 없겠구나 싶어 또 한번 맥이 빠졌다. 하지만 어쩌랴, 대화는 시작됐고 그는 최선을 다해 주었다.

지 궁둥이로 덥힌 자리가 최고

손석희는 재수를 했다. 그러고도 또 쓴잔을 마셨다. ‘포기가 빠른’ 그는 미련없이 국민대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1979년 ‘좀 편해보겠다고 타자 배워 간 군대’에서 그는 10·26, 12·12, 5·18, 삼청교육대 사건을 겪었다. 근무지는 부산 군수사령부였다. 다른 건들이야 그저 구경꾼일 뿐이었지만 ‘삼청작전’은 달랐다. 실탄 없는 카빈총을 지급받은 그는 동료들과 함께, 광안리로 해운대로 다니며 몸에 문신한 이들을 잡아 모았다. 당시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화인(火印)이 됐다.

그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은 취업난이 극에 달한 때였다. 국문과 출신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았다. 그나마 언론사가 차별 없이 대등한 경쟁을 펼칠 수 있는 곳이었다. 한 유력 일간지 총무부 사원으로 입사했다 진로를 바꿔 다시 MBC 입사시험을 쳤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는 “주체적이지 못한 선택”이었다. “넌 방송반도 했고 그 쪽에 잘 어울리니 (시험) 한번 봐 보라”는 친구들의 권유가 결정적이었다. 1984년 그는 MBC 아나운서가 됐다. 기자·PD직을 포함, 전체 수석 합격의 영예도 안았다. 그에게 “수석이었다면서요” 하니 빙긋 웃으며 “NCND(긍정도 부정도 아님)”라고 답했다.

친구들의 눈은 정확했다. 그는 타고난 방송쟁이였다. 입사 후 2, 3년이 지났을 무렵엔 가히 MBC를 대표하는 아나운서라 해도 손색없을 만큼 입지를 확실히 굳혔다. 1986년에는 보도국으로 발령이 났다. 기자가 된 것이다.

“당시 제가 맡은 프로가 5개였는데 그 중 3개가 뉴스였어요. 앵커 이미지가 워낙 강하니까 회사측에서 직종을 바꾸는 게 어떨까 생각한 거죠. 보도국 분들이야 아주 잘 대해주셨지만 전 불만이었어요. 왠지 제 자리가 아닌 것 같고, 무엇보다 사람은 지 궁둥이로 덥힌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1989년 다행히 아나운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죠.” 그는 “아나운서가 기자직 발령이 나면 마치 업그레이드된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시각”이라고 말했다.

생방송 중 볼펜을 집어던지다

어떤 이의 삶에나 ‘특별한 순간’은 있다. 손석희에게는 일요일이던 1988년 8월21일 저녁 9시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가슴에 ‘공정방송’이란 글귀가 쓰인 리본을 달고 ‘뉴스데스크’를 진행한 것이다.

서울올림픽을 목전에 두고 사회 분위기가 급변하던 그때, MBC 노조는 정부의 방송관련법 개악에 맞서 쟁위발생 신고를 했다. 방송할 때를 포함해 조합원 모두 가슴에 ‘공정방송’ 리본을 달기로 했다.

8월20일 토요일 오전 9시30분, 조합원은 물론 경영진까지 촉각을 곤두세운 가운데 첫 ‘리본 패용 방송 출연자’가 등장했다. 주부대상 교양 프로그램 리포터로 나선 이장호 이현경 아나운서였다. 다음 생방송 진행자는 ‘낮 뉴스’ 앵커인 김성호 아나운서. 그 또한 방송시작 직전 리본을 달았지만 곧 빼앗기고 말았다. 주말 ‘뉴스데스크’ 진행을 맡고 있던 그는 속이 탔다. 시청자의 시선이 집중되는 프로그램인 만큼 파장도 클 것이 확실했다. 방송 시작 직전까지 갈등하던 그는 ‘기억하는 한 가장 수치스럽고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했다. 리본을 양복 깃이 아닌 안쪽 와이셔츠 주머니 위에 단 것이다.
방송 종료 뒤 누구도 그를 나무라지 않았지만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자괴심에 빠졌다. 밤새 한숨도 못잔 그는 다음날 아침 아내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달고 나갈 거야.” 그리고 그렇게 했다.

노조 집행부는 혹 그가 리본을 빼앗기는 일이 생길세라 스튜디오 문을 지키고 고함을 질러댔다. 카메라맨들은 그가 달고 있는 리본이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도록 열심히 앵글을 잡았다. 이로써 그는 직업인으로서, 또 방송인으로서 양심을 훌륭히 지켜낼 수 있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별 탈 없이 방송활동을 해나가듯 보이던 그가 또 한 번 국민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심는 사건이 생겼다. 1992년 10월 파업투쟁 중 노조 집행부 일원으로 일하다 몇몇 동료와 함께 영등포구치소에 구속수감된 것이다. ‘MBC 간판스타’인 그가 푸른 수의를 입고 수갑과 포승줄에 겹겹이 묶인 모습은 강한 연민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파업 정당성 알리기에 여념이 없던 노조로서는 이 같은 ‘손석희 효과’를 외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또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조용히 인정했다.

오히려 그가 걱정한 것은 “한 일도 없는데 무슨 민주 투사라도 되는 양 대접받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야말로 노조활동으로 인해 가장 큰 수혜를 받은 사람”임을 거듭 강조했다. 자신에게 노조활동은 “안 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던 일”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혹자는 열성적이었던 노조활동을 들어 그를 이상주의자 혹은 선동가적 기질이 다분한 이로 볼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매우 ‘프랙티컬(practical)’한 사람이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그는 “결국 선택의 문제”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고 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건 모두 ‘선택’인 거죠. 실수란 선택을 잘못한 것이고요. 그럼 실수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잘못한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해야죠. 전 그래서 제가 간 길에 대해 실수란 표현을 잘 쓰지 않아요. 일종의 자기합리화인데, 제 자신을 평가하는 덴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고 보거든요.”

이야말로 실용적 자세다. 이미 지나간 일, 선택해버린 것에 대해 땅을 치고 후회하는 것은 비생산적 방식이다. 그가 “포기가 빠른 사람”이라 말하는 이면엔 아마도 ‘내가 포기한 건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일 뿐’이란 생각이 깔려 있을 것이다. 하여 프랙티컬한 사람들은 과거보다 ‘지금 이 순간’을 생각한다. 구구한 언설보다는 문제해결을 위해 ‘지금 당장 할 일’을 고민한다.

“그러니까 ‘이거 실수다’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전력을 다해 만회할 길을 찾는 거지요. 잘한 선택은 그것이 잘한 일임을 증명하기 위해 애쓰고, 나쁜 선택은 또 그게 결과적으론 잘된 선택이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고. 이래저래 에너지가 상당히 많이 드는데, 하여튼 전 몇 십년을 그렇게 살아왔어요.”

프랙티컬한 사람들은 의외로 눈 앞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는다. 작은 거짓, 사소한 편의 도모가 훗날 치명적 약점이 돼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또한 원칙에 충실한데, 그것이야말로 내적 갈등으로 인한 시간 낭비를 줄이고 직업인으로서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는 데 유용한 길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손석희는 성공한 방송인이길 원했다. 성공한 방송인은 시청자에게 신뢰받는 방송인이다. 신뢰받는 방송인이라면 당연히 공정 방송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소망과 자신에게 부여된 직업인으로서의 소명, 시청자의 바람을 합치시키려는 노력을 통해 나름의 행복을 추구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

시사 프로에 적합한 방송인이 되기 위해 기울여온 프랙티컬한 노력들을 통해, 그는 냉정하고 절제력 강하며 자기관리 뛰어난 언론인의 이미지를 확고히 하게 됐다. 이는 그의 실제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 뵀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 가운데 도무지 동의할 수 없는 게 ‘차분하다’ ‘냉정하다’ ‘절제력 있다’는 류의 것들이라고 했다. 인상비평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절 아는 사람들은 그래요. 방송 듣다보면 네 성격 나올까봐 조마조마하다고. 저도 사람이니 인터뷰 도중 성질나는 일이 아주 없을 순 없죠. 지난번엔 너무 화가 나 볼펜을 집어던지기도 했어요.”

때론 방송 중 크고작은 ‘모험’을 시도한다. 방송 종료를 30초쯤 남겨놓고 그가 인터뷰이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지면 스튜디오 밖에서는 난리가 난다.
“하지만 제 생각은 ‘방송시간은 금싸라기처럼 쓰자’는 거거든요. 개인적 멘트는 빼고 30분을 기름 쫙 빠진 Q&A(질문과 답)로 꽉 채우자….”

“영향력? 내년엔 밀릴 수 있다”

그의 라디오 인터뷰는 언제나 긴장이 넘친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말을 잘 못하기 때문에 실수를 피하려 훈련한” 간결한 어조가 그런 분위기를 배가한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라면 청취자의 반응이 그처럼 열광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방송은 뜨겁다. 철저히 중립자요 질문하는 자이지만, 그 안엔 ‘상식’을 향한 열정과 ‘이해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있다. 또한 방송시간은 시청자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란 강력한 동기부여하에, 인터뷰이를 향한 가차없는 질문 공세를 멈추지 않는다. 또 다른 장점은 상대의 얘기를 참 ‘잘 듣는다’는 것. 잘 듣고 핵심을 집어내 한두 마디로 정리해낸다. 내용을 요약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이의 속내와 발언의 논리적 모순까지를 일거에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렇게 그는 가슴 저 깊숙이 ‘불’을 품은 채 방송을 한다. 시청자들은 그 불의 존재를 분명히 느낀다. 언뜻 보면 그의 방송과 이미지엔 개성이 없어 뵌다. 하지만 완벽을 향한 몰두, 좋은 방송에 대한 뚜렷한 소신이야말로 그의 색깔이다.

하지만 그라고 해서 ‘안티’가 없을 순 없다. 그를 비난하는 네티즌들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말이 바로 “과대포장됐다”는 것이다. 그는 “미디어가 인물을 담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포장은 시작되는 것”이라 맞받아쳤다.

“그런데 전 22년을 미디어에 노출돼 왔어요. 저에 대한 이미지가 어떻게 잡혀 있든, 그것은 제가 노력을 통해 지켜온 것입니다. TV 속 이미지와 ‘현실의 나’ 사이 괴리를 줄이기 위해 애써 온 거죠.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그런 노력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면 아마 지금의 전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겁니다. 또 하나, 과대포장이란 지적 뒤에는 아마 아나운서직에 대한 편견이 숨어있을 거예요. 준비된 원고를 읽기만 하는 사람이라거나…. 하지만 아나운서들과 하루만 같이 생활해보면 그것이 오해임을 알게 될 겁니다. 아나운서는 저널리즘의 굉장히 다양한 분야를 체험하는 사람들입니다. 폭넓은 실전 경험을 통해 내공이 쌓이지요. 물론 자신의 핵심 이미지는 지켜나가려 노력해야겠지만요.”

그렇다면 그는 직종의 경계를 뛰어넘은 자신의 거대한 영향력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우선 감사하죠. 제가 맡은 프로가 한밤중에 하는 ‘100분 토론’, 새벽에 하는 ‘시선집중’ 둘인데, 모두 프라임 시간대하고는 거리가 멀잖아요. 그럼에도 좋은 평가를 해주시니 정말 감사하고. 또 이건 겸손의 말이 아니라, 방송이라는 게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거든요.

그렇게 두루 고마운 마음이 반이라면 나머지 반은 굉장한 부담감이예요. 그 ‘영향력’이라는 것이 (방송) 콘텐츠에 어떤 왜곡을 불러오진 않을까, 무슨 오해라도 받지 않을까 늘 걱정되고요. 예를 들어 좀 더 세게 말하고 싶은 부분도 주저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내린 결론이, 감사하긴 하나 얽매이지는 말자는 거예요. 또 내년엔 밀릴 수도 있는 거잖아요. 사실 이런 식의 순위 매기기 자체가 굉장히 상업주의적인 거거든요.”
손석희는 1997~99년 가족을 모두 데리고 미국으로 훌쩍 유학을 떠났다. 마흔 넘어 과감히 현업을 떠나는 ‘대형사고’를 친 것이다.

“1992년 파업으로 구치소에 들어가 있을 때였어요. 그 위로 비행기 길이 나 있는데, 운동시간 20분 동안 뒷마당에 나가 있으면 비행기가 굉장히 낮게 날아와요. 그걸 보며 생각했죠. 여기서 나가면 저 비행기를 타고 어디론가 멀리 가서 살고 싶다…. 그런 꿈을 계속 갖고 있다 마침내 실행에 옮긴 거죠.”

유학 시절의 눈물

처음 목적은 공부도 아니었다. 그저 모든 걸 딱 멈추고 쉬고 싶었다. 회사에서 1년만 갔다 오라는 걸 ‘자비연수 주제에’ 굳이 2년을 고집했다. 쉴 바에야 확실히 쉬자는 결심이었다. “그래놓고 결국 코피 터지며 공부만 하다 왔죠. 뒤늦게 한 국제 민간재단에서 장학금을 받게 된 것이 계기였어요.”
하지만 그에게 강한 동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는 토플 공부부터 다시 시작해, 미네소타대 대학원에서 기어이 저널리즘 석사학위를 따고 말았다. 마침 요즘 인터넷에선 그가 유학 생활을 회상하며 쓴 ‘지각 인생’이란 제목의 글이 인기를 끌고 있다. 글 말미는 이렇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무모했다. 하지만 그때 내린 결정이 내게 남겨준 것은 있다. 그 잘난 석사학위? 그것은 종이 한 장으로 남았을 뿐, 그보다 더 큰 것은 따로 있다. 첫 학기 첫 시험 때 시간이 모자라 답안을 완성하지 못한 뒤 연구실 구석으로 돌아와 억울함에 겨워 찔끔 흘렸던 눈물이 그것이다. 중학생이나 흘릴 법한 눈물을 나이 마흔셋에 흘렸던 것은 내가 비록 뒤늦게 선택한 길이었지만 그만큼 절실하게 매달려 있었다는 방증이었기에 내게는 소중하게 남아있는 기억이다. 혹 앞으로도 여전히 지각인생을 살더라도 그런 절실함이 있는 한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MBC의 자유로움은 공영방송 보루”

요즘 그의 맘은 어둡다. 평생을 몸담아 온 직장 MBC가 큰 어려움에 처한 때문이다. 그는 “내가 기억하는 한 MBC가 이처럼 국민의 미움을 받은 적은 없었다”며 “MBC가 쌓아온 역사성마저 한순간에 묻혀버린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그는 MBC의 게이트키핑 기능에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세간의 지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게이트키핑이라는 게 여러 층위에서 논의가 가능하거든요. PD·기자·아나운서 등 최일선에서 이루어지는 것부터 그 위의 부장, 국장선까지. 개인 수준의 게이트키핑은 기본적으로 이루어지는거고, 그렇다면 조직 차원의 게이트키핑은 어떠냐는 건데…. 기본적으로 MBC 시스템은 개인을 통제 조정하는 것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껏 그것이 굉장한 순기능으로 작용해왔고요.”

그는 “사영방송이라면 대주주, 경영진의 생각이 밑바닥까지 작용할 거다. 하지만 공영방송은 그래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공영방송에서는 모든 논의가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보건 보수이건 다 담아낼 수 있어야지요. MBC 라디오만 해도 쭉 들어보면 프로마다 방향과 생각이 제각각이거든요. 그런 다양성을 통해 청취자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지요. 그것이 공영방송의 도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MBC란) 조직 내 다원화가 시청자에겐 좋은 것일 수도 있다”며 “이번 ‘PD수첩’ 파문 역시 역기능의 증거가 될지 순기능적 측면에서 재평가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궁극적으로는 대중을, 네티즌을 믿는다고 했다.

“모두 사필귀정이죠. 가는 길이 바르다면 대중과 영원히 안 맞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방송을 하겠어요.”

호감도와 신뢰도가 높은 방송인인 만큼, 그에 대한 정치권의 ‘입질’이 시작된 것은 벌써 10여 년 전부터의 일이다. 그 또한 “관심 없다”는 의견 표명을 되풀이한 지 10년이 넘었다.

“전 지금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방송이 체질에 맞고 그런 면에서 참 운이 좋은 편이라 생각해요. 운 좋은 건 한 번으로 족하지 두 번 그럴 수는 없을 겁니다. 또 일단 그 동네로 가면 굉장히 부지런해야 하고 만나기 싫은 사람도 만나야 하잖아요. 저랑은 영 안 맞지요.”

사실 손석희는 인간관계의 폭이 꽤나 좁은 사람이다. 사교적이지 않은 성격 탓도 있지만, 시사 프로 진행자인 만큼 객관성과 공정성을 견지하기 위해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술도 거의 마시지 않고 골프도 치지 않는다. 이렇다 보니 오랜 친구들과의 관계마저 요즘에 와선 차츰 소원해지고 있다 했다. ‘좋은 시사 프로 진행자’가 되기 위해 그가 지급한 것 중에는 가족과의 곰살궂은 정 나누기도 있다. 그에게는 후배 아나운서이던 아내 신현숙씨와 고등학생, 중학생인 두 아들이 있다.

사람의 집중력이라는 게 한계가 있나 봐요. 새벽 방송에 집중하고 또 일주일에 며칠은 ‘100분 토론’ 준비에 바치다 보니 다른 쪽으로는 영 신경이 안 가는 거죠. 덕분에 사적인 부분에 대한 집중도는 형편없어요.”

뿐인가, 그는 스스로를 ‘강퍅한 인간’이라 표현했다. 일밖에 모르기 때문이란다. “그러다 회사 그만두고 나면 심심해 어쩌려느냐”는 걱정을 미리 해주는 이가 적지 않단다. 그도 이미 오십 고개를 넘어 장년(長年)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쉰 나이 받아들일 자존심은 있다

“새벽마다 회사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사무실로 올라가죠. 복도를 따라 걷다 커브를 돌면 엘리베이터가 나오는데, 매일 똑같은 생각을 해요. 이 커브를 몇 번이나 더 돌 수 있을까….”
해서 “나이 먹는 것이 두렵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재미있는 답이 돌아왔다. “쉰이란 나이를 받아들일 정도의 자존심은 있다”는 것이었다. “마흔이고 싶고 서른이고 싶지는 않아요. 추해지는 거죠. 제가 원래 포기가 빠르다 그랬잖아요.”

어느새 약속한 2시간이 다 지났다. 아직 채 듣지 못한 것이 많아 적이 답답했다. “어, 목이 또 잠기기 시작하는데요” 하며 ‘겁’을 주는 그가 얄밉게 느껴졌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어쨌거나 다 합쳐 대여섯 시간 열심히 수다를 떨고 나니 첫 대면 땐 보이지 않던 그의 ‘미중년’다운 특징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그가 들으면 불쾌해할지도 모를 일이나, 그에게는 분명 ‘품격 있는 따스함, 권위를 살짝 위반하는 귀여움, 자기만의 개성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섹시함’ 같은 것이 존재한다. 다만 그가 혼신을 다해 구축하고 유지해 온 방송인으로서의 삶과 이미지가 ‘자연인 손석희’의 열정적이고 감성적인 면모를 효과적으로 제어하고 있을 뿐이었다.

10년 전, 그는 ‘나이 쉰에 나는 무엇을 보여줄까’란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에서 손석희는 20일 남짓한 영등포구치소 생활 중 만난 ㄱ씨 이야기를 하며 ‘그가 출감할 때인 10년 후, 나는 그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를 자문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답을 찾은 듯하다. 그는 ‘꼰대’도 되지 않았고 ‘배불뚝이’도 되지 않았다. 대신 미소년보다 되기 어렵다는 ‘미중년’이 됐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