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12월19일 법정에서 김근태 전 장관이 한 진술입니다.
"본인은 9월 한 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하였습니다. (어지러운 듯 말을 중단하고 난간을 붙들면서 잠깐 쉬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9월4일 각 5시간씩 두 차례 물고문을 당했고,
9월5일,9월 6일 각 한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 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차례, 13일.......... 13일의 금요일입니다. 9월 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날이다." 이러한 협박을 가하면서 두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그 다음에 20일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 차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25일날 집단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
물론 잠을 못 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대략 절반쯤 됩니다. 고문 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먹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밥을 먹지 못합니다.
가방을 갖고 다니면서 그
가방에 고문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는 본인에게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철을 만났다. 이재문 (남민전 사건의 주범,옥사했음)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를 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 서 줄테니까 그때 너가
복수를 해라" 이러한 참혹한 이야기를 하며 본인에 대한 동물적인 능욕을 가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은 알몸이 되고 알몸상태로 고문대 위에 묶여졌습니다. 추위와 신체적으로 위축돼 있는 상태에서
본인에 대해 성적인 모욕까지 가했습니다. 말씀드리면 제 생식기를 가리키면서 "이것도 좆이라고 달고다녀? 민주화 운동 하는 놈들은 다 이따위야!" 이렇게, 말하자면 깔아뭉개고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고문을 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눕히면서 몸을 다섯군데를 묶었습니다. 발목과 무르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깝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 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하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이때
방청석에서 울음이 터지기 시작, 본인도 울먹이며 진술함) 이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방청석은 울음바다가
되고 심지어 교도관들조차 숙연해짐)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러한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인간적인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방청석 통곡)
그들은 고문을 하면서 "시집간 딸이 잘 사는지 모르겠다." "아들놈이 체력장을 잘 치뤘는지 모르겠다."는 등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애정 어린 말들을 주고 받았으며 본인에게도 이야기 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고문과 폭력적 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이 개인의 가족들에게는 인간적인 사랑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양면성이 공존할 수도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고문을 전담하던 자 중의
한 사람은
-이름을 밝히진 않겠지만- 나중에 혼자서 제 손을 잡고 이야기하기를
"고문하는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났다. 여기서 빨리나가라. 허위로라도 다 인정해라. 여기 있으면 당신은 죽는다"고 울면서 얘기했습니다. 결국 9월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 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집단폭행을 가한 후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
단독인터뷰 ‘고문기술자’
이근안 격정토로
2탄
그 시절 심문(審問)은 ‘예술’이었다
이수영 기자 | severo@dailysun.co.kr , [825호] 승인 2010.02.16 10:12:14
“나를
둘러싼 논란과 주위의 비난이 두렵다.”
이근안 전 경감과의 단독 인터뷰가 보도된 직후인 지난 8일 그는 [일요서울]에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저 이근안 목사입니다”라고 말문을 연 그는 덤덤한 말투로 기자의 안부를 물은 뒤 “주말 부천의 모 교회에서 신앙 간증을 마쳤다”며 자신의 근황도 전했다.
“이야기를 가감 없이 전달해줘 고맙다”는 인사 말미에서야 이 전 경감은 조심스럽게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앞으로 나갈 인터뷰 내용 중 몇몇 인사들과 얽힌 일화는 빼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김근태 전 복지부 장관을 비롯한 재직당시 공안사건 주역들 얘기다.
사건 비화가 담길 금주 보도를 염려한 듯했다. 이 전 경감은 지난호(제 824호 참고)를 통해 사건과 관련해 기존 알려졌던 주장들이 상당부분 과장됐거나 허위라고 밝힌 바 있다. 이때 그는 자신의 근황과 과거 도피, 수감생활을 털어놨다. [일요서울]은 지난호에 이어 더욱 충격적인 이 전 경감의 격정토로를 지상 중계한다. 이 전 경감이 전하는 진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지금부터 목회자인 그가 십자가를 가슴에 대고 고해성사하듯 털어놓는 김근태 전 장관 고문, 남민전 사건의 진실을 들어보자.
인터뷰 내용을 일부 보도하지 말아달라는 이 전 경감의 부탁에 “본인의 인터뷰 내용이 거짓이었느냐”고 반문했다. 이 전 경감은 펄쩍 뛰었다. 그는 “이제 와서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느냐”면서도 “하지만 내가 아무리 해명을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근안’을 손가락질 하고 욕한다. 그 모욕감을 견딜 자신이 없다”고 긴 한숨을 토했다.
그동안 이어진 여러 고문피해자들의 증언은 이 전 경감이 [일요서울]을 통해 밝힌 당시 상황과 정반대다. 과연 누구의 입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군사정권 시절 ‘빨갱이’로 몰렸던 이들은 DJ정권 이후 민주투사가 됐다. 그리고 빨갱이를 잡던 ‘파수꾼’은 17년간 도피와 수감생활 끝에 ‘고문기술자’라는 주홍글씨를 단 ‘죄인’이 됐다.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것이다. 그러나 이들 사이엔 아직 풀리지 않은 숙제가 있다. 양쪽 모두 피해자라 주장하는 가운데 적어도 이들 중 한쪽은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
이 전 경감은 재직시절 피의자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강제심문’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끔찍한 고문기술은 없었다고 그는 단호히 말했다. 일반에 알려진 것처럼 잔혹한 고문이 동원된 적은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강제심문과 고문,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과거의 피해자와 현재의 피해자가 엇갈리는 증언을 내놓고 있다.
다음은 이 전 경감과의 일문일답 전문이다.
※ 주관적인 입장을 배제하고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 전 경감과의 대화는 일문일답으로 엮었다.
“강압심문 있었지만 ‘고문기술’ 없었다”
- 심문 과정에서 ‘무자비한’ 고문이 실제 있었나.
▲ ‘심문’은 혐의가 확실하고 물증이 있는 용의자를 조사하는 것이다. 문제는 72시간 안에 모든 심문을 마쳐야 한다는 점이다. 공안사건에 연루된 피의자 대부분은 묵비권을 행사하거나 자해를 하는 등 조사에 비협조적이다.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도 심문이 안 되면 할 수 없이 ‘강압심문’을 하게 된다.
- ‘강압심문’이 고문 아닌가.
▲ 주먹으로 몇 대 쥐어박거나 유도(柔道)기술을 이용해 업어치기정도는 했다. 이것을 ‘고문’이라 한다면 변명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이상의 가혹행위는 없었다.
- ‘관절빼기’ ‘볼펜심 꽂기’ ‘통닭구이’ 등등 직접 고안한 것으로 알려진 고문기술들이 상당히 다양하다. 이런 기술들을 단 한 번도 동원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 그 기술들이 어떤 것인지 나도 최근에야 알았다. 오랫동안 무도(武道)를 한 내가 그렇게 치사한 기술을 동원했다는 주장에 기가 막혔다. 내가 저지른 일은 당당히 “했다”고 인정할 수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런 기술들은 써본 적도 없고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
- 이상의 고문기술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란 얘긴가.
▲ 그렇다. 일부 언론이 나를 ‘관절빼기의 명수’라고 부르던데 상식적으로 관절을 뽑으면 주위 인대가 늘어난다. 늘어난 인대는 관절을 다시 끼운다 해도 금방 회복되지 않아 상당기간 깁스 등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깁스하고 재판 받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는가. 과거 심문과정에서 난동을 부리는 피의자 몇 명을 완력으로 제압하다 팔이 빠지는 경우가 있긴 했다. 아마 이런 일화들 때문에 내게 ‘기술자’라는 호칭이 붙은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피의자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고다.
- 고문피해자 상당수가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가혹행위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고통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 쫓기던 시절에는 이 사람들이 도대체 왜 조사만 받고 나오면 ‘고문당했다고’ 하는지 원망스러웠다. 결국 그들 나름의 ‘자기합리화’ 때문이라고 여겼다. 공안사건에 연루되는 인사들은 비밀결사 등 조직에 소속돼 있다. 조사를 받은 이들 상당수는 해당 조직 기밀을 당국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원래 조직으로 복귀한 뒤 대접이 예전 같겠는가. ‘배신자’ 소리 듣지 않으려면 비밀누설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대야 한다. 결국 ‘고문에 못 이겨서’라는 대답이 제일 타당하지 않겠나.
- 고문피해자로 나선 이들과 본인의 주장이 너무 상반된다.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얘기 아닌가.
▲ 진실공방이 벌어진다 해도 내가 안 한 것은 안 한 거다. 화가 나면 쥐어박지 치사하게 뭘 접고, 꽂고 하겠나.
장관 김근태와 죄수 이근안의 포옹
- 85년 김근태 당시 민청련 의장 고문사건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전기고문’ 파문도 그때 불거졌다.
▲ 처음부터 내가 그 사건을 수사한 것은 아니다. 당시 민청련 초대의장이었던 김근태씨는 수시로 정보기관에 연행된 전력이 있었다. 가족 중에도 이적 혐의가 짙은 인물이 있어 당국이 예의주시하던 인물이었다. 검거 된 그가 무려 12일 동안 묵비권을 행사하자 치안본부에서 내게 수사기록을 넘겼다. 하룻밤 꼬박 새며 수사기록을 본 뒤 “간첩이라 결론을 낼 수는 없지만 지하조직에 몸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를 하자 직접 심문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절대 피의자 몸에 손대지 말라’는 특별지시가 내려온 상황에서 그의 입을 열게 할 방법으로 고안한 것이 이른바 ‘전기고문’이었다.
- 피의자 입을 열게 하려고 전기고문을 했다는 건가.
▲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게 있다. 당시 전기고문의 실체는 내가 취미삼아 만든 모형 비행기 모터에서 뺀 ‘AA 건전지 2개’라는 점이다.
- 건전지 2개로 전기고문이 가능한가?
▲ 그래서 고문이 아니라는 거다. 그때 김근태씨를 앞에 두고 두 시간 넘게 일부러 말로 겁을 줬다. “너 같은 녀석은 전기구이를 해 버려야 바른 말을 한다”는 식으로 상대를 주눅 들게 한 것이다. 한참후에 눈을 가린 뒤 맨 발바닥에 소금물을 뿌리고 건전지 두 개를 대며 계속 겁을 줬다. 이미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찌릿찌릿한 감각이 느껴지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나.
- ‘잔혹한’ 전기고문에 대한 증언은 또 있다. 민병두 전 민주당 의원은 과거 언론 기고문에서 “이근안은 잡지 ‘선데이서울’ 보면서 전기고문의 볼트수를 올렸다 내렸다”라고 밝혔었다.
▲ 손가락만한 건전지 2개가 전부인데 어떻게 전압을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 2005년 여주교도소 수감 당시 김근태 당시 복지부장관과 독대하며 과거의 잘못을 사죄했다고 알려졌다. 이것도 사실이 아닌가?
▲ 어느 날 교도소장이 불러서 갔더니 “복지부 장관이 영감님 면회를 오신다는데 한번 만나보라”고 하더라. 현직 장관이 직접 온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나. 변호사들이 수감자를 만나는 ‘특별접견실’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니 김 장관이 들어왔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지날 일은 죄송하게 됐다”고 하자 김근태 장관이 양팔을 벌려 포옹을 해왔다. 그리고는 “그게 어떻게 개인의 잘못이냐. 이 시대가 낳은 비극 아니냐”며 위로를 건네는 게 아닌가. 솔직히 ‘정말 그릇이 큰 양반’이라고 느꼈다.
- 당시 언론에는 ‘눈 감을 때까지 용서를 구할 것’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 등의 내용이 실렸다.
▲ 김근태씨에게 종교에 심취해 있다는 나의 근황을 전하며 로마서 3장10절(기록 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나니)을 인용했다. 그랬더니 사흘 뒤 신문에는 내가 무릎을 꿇고 빈 것으로 묘사됐다. 사실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무릎을 꿇거나 큰 절을 올린 일은 없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고 ‘붓쟁이’들의 말장난에 웃었다. 동료 수감자들은 ‘김근태가 영감님을 이용해 정치적 쇼를 한 거 아니냐’고도 했다. 하지만 김근태씨가 그곳까지 날 만나러 왔을 때는 정말 과거의 앙금을 털어버릴 뜻으로 오지 않았겠는가. 지금도 김근태씨가 정략적으로 날 이용하기 위해 만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얕은 수를 쓸 사람은 아니라고 느꼈다. 이후 김근태씨가 내 특별사면을 건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면은 불발됐지만 차라리 형기를 모두 채우고 출소한 게 다행이었다. 마음의 짐을 하나라도 덜은 셈이니까.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 재직 당시 간첩검거에 능했다. 실제 잡아들인 간첩단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 그건 국가기밀이다. 당시 남한에는 북한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간첩이 상당히 많았다. 공식적인 간첩검거 유공은 4건이지만 실제는 그보다 훨씬 많다는 것 정도만 밝히겠다.
- 2000년대 이후 이른바 ‘조작간첩’ 사건이 불거지며 상당수 인사들이 무죄를 선고받거나 민주화인사로 승격됐다. 이중엔 직접 담당했던 사건도 적지 않다.
▲ 일일이 할 말은 많지만 이 자리에서는 밝히지 않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피의자들의 혐의를 입증할 물증이 충분했다는 점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그때 수사기록은 모두 쓰레기가 됐다.
- 평생을 ‘고문기술자’로 불리며 숨어 지냈다. 시간을 돌려 과거로 간다면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 아니다.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애국’이었으니까.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고문기술자’라는 명칭에 대한 솔직한 심경은.
▲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니다.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심문 기술자’가 맞을 것 같다. 논리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이와 이를 깨려는 수사관은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인다. 속된 말로 ‘선수끼리’의 대결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비록 나는 그 예술을 아름답게 장식하지 못했지만.
===========================
30일 뇌정맥혈전증 등으로 숨진 김 고문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
빈소에는 여야·계파를 넘어 조문객 수천 명이 다녀갔다. 이 전 경감은 출소해 현재 목사로 활동 중이다
======================
김근태 육필 항소이유서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3112.html
이근안 전 경감과의 단독 인터뷰가 보도된 직후인 지난 8일 그는 [일요서울]에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저 이근안 목사입니다”라고 말문을 연 그는 덤덤한 말투로 기자의 안부를 물은 뒤 “주말 부천의 모 교회에서 신앙 간증을 마쳤다”며 자신의 근황도 전했다.
“이야기를 가감 없이 전달해줘 고맙다”는 인사 말미에서야 이 전 경감은 조심스럽게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앞으로 나갈 인터뷰 내용 중 몇몇 인사들과 얽힌 일화는 빼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김근태 전 복지부 장관을 비롯한 재직당시 공안사건 주역들 얘기다.
사건 비화가 담길 금주 보도를 염려한 듯했다. 이 전 경감은 지난호(제 824호 참고)를 통해 사건과 관련해 기존 알려졌던 주장들이 상당부분 과장됐거나 허위라고 밝힌 바 있다. 이때 그는 자신의 근황과 과거 도피, 수감생활을 털어놨다. [일요서울]은 지난호에 이어 더욱 충격적인 이 전 경감의 격정토로를 지상 중계한다. 이 전 경감이 전하는 진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지금부터 목회자인 그가 십자가를 가슴에 대고 고해성사하듯 털어놓는 김근태 전 장관 고문, 남민전 사건의 진실을 들어보자.
인터뷰 내용을 일부 보도하지 말아달라는 이 전 경감의 부탁에 “본인의 인터뷰 내용이 거짓이었느냐”고 반문했다. 이 전 경감은 펄쩍 뛰었다. 그는 “이제 와서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느냐”면서도 “하지만 내가 아무리 해명을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근안’을 손가락질 하고 욕한다. 그 모욕감을 견딜 자신이 없다”고 긴 한숨을 토했다.
그동안 이어진 여러 고문피해자들의 증언은 이 전 경감이 [일요서울]을 통해 밝힌 당시 상황과 정반대다. 과연 누구의 입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군사정권 시절 ‘빨갱이’로 몰렸던 이들은 DJ정권 이후 민주투사가 됐다. 그리고 빨갱이를 잡던 ‘파수꾼’은 17년간 도피와 수감생활 끝에 ‘고문기술자’라는 주홍글씨를 단 ‘죄인’이 됐다.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것이다. 그러나 이들 사이엔 아직 풀리지 않은 숙제가 있다. 양쪽 모두 피해자라 주장하는 가운데 적어도 이들 중 한쪽은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
이 전 경감은 재직시절 피의자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강제심문’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끔찍한 고문기술은 없었다고 그는 단호히 말했다. 일반에 알려진 것처럼 잔혹한 고문이 동원된 적은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강제심문과 고문,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과거의 피해자와 현재의 피해자가 엇갈리는 증언을 내놓고 있다.
다음은 이 전 경감과의 일문일답 전문이다.
※ 주관적인 입장을 배제하고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 전 경감과의 대화는 일문일답으로 엮었다.
“강압심문 있었지만 ‘고문기술’ 없었다”
- 심문 과정에서 ‘무자비한’ 고문이 실제 있었나.
▲ ‘심문’은 혐의가 확실하고 물증이 있는 용의자를 조사하는 것이다. 문제는 72시간 안에 모든 심문을 마쳐야 한다는 점이다. 공안사건에 연루된 피의자 대부분은 묵비권을 행사하거나 자해를 하는 등 조사에 비협조적이다.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도 심문이 안 되면 할 수 없이 ‘강압심문’을 하게 된다.
- ‘강압심문’이 고문 아닌가.
▲ 주먹으로 몇 대 쥐어박거나 유도(柔道)기술을 이용해 업어치기정도는 했다. 이것을 ‘고문’이라 한다면 변명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이상의 가혹행위는 없었다.
- ‘관절빼기’ ‘볼펜심 꽂기’ ‘통닭구이’ 등등 직접 고안한 것으로 알려진 고문기술들이 상당히 다양하다. 이런 기술들을 단 한 번도 동원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 그 기술들이 어떤 것인지 나도 최근에야 알았다. 오랫동안 무도(武道)를 한 내가 그렇게 치사한 기술을 동원했다는 주장에 기가 막혔다. 내가 저지른 일은 당당히 “했다”고 인정할 수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런 기술들은 써본 적도 없고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
- 이상의 고문기술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란 얘긴가.
▲ 그렇다. 일부 언론이 나를 ‘관절빼기의 명수’라고 부르던데 상식적으로 관절을 뽑으면 주위 인대가 늘어난다. 늘어난 인대는 관절을 다시 끼운다 해도 금방 회복되지 않아 상당기간 깁스 등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깁스하고 재판 받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는가. 과거 심문과정에서 난동을 부리는 피의자 몇 명을 완력으로 제압하다 팔이 빠지는 경우가 있긴 했다. 아마 이런 일화들 때문에 내게 ‘기술자’라는 호칭이 붙은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피의자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고다.
- 고문피해자 상당수가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가혹행위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고통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 쫓기던 시절에는 이 사람들이 도대체 왜 조사만 받고 나오면 ‘고문당했다고’ 하는지 원망스러웠다. 결국 그들 나름의 ‘자기합리화’ 때문이라고 여겼다. 공안사건에 연루되는 인사들은 비밀결사 등 조직에 소속돼 있다. 조사를 받은 이들 상당수는 해당 조직 기밀을 당국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원래 조직으로 복귀한 뒤 대접이 예전 같겠는가. ‘배신자’ 소리 듣지 않으려면 비밀누설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대야 한다. 결국 ‘고문에 못 이겨서’라는 대답이 제일 타당하지 않겠나.
- 고문피해자로 나선 이들과 본인의 주장이 너무 상반된다.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얘기 아닌가.
▲ 진실공방이 벌어진다 해도 내가 안 한 것은 안 한 거다. 화가 나면 쥐어박지 치사하게 뭘 접고, 꽂고 하겠나.
장관 김근태와 죄수 이근안의 포옹
- 85년 김근태 당시 민청련 의장 고문사건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전기고문’ 파문도 그때 불거졌다.
▲ 처음부터 내가 그 사건을 수사한 것은 아니다. 당시 민청련 초대의장이었던 김근태씨는 수시로 정보기관에 연행된 전력이 있었다. 가족 중에도 이적 혐의가 짙은 인물이 있어 당국이 예의주시하던 인물이었다. 검거 된 그가 무려 12일 동안 묵비권을 행사하자 치안본부에서 내게 수사기록을 넘겼다. 하룻밤 꼬박 새며 수사기록을 본 뒤 “간첩이라 결론을 낼 수는 없지만 지하조직에 몸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를 하자 직접 심문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절대 피의자 몸에 손대지 말라’는 특별지시가 내려온 상황에서 그의 입을 열게 할 방법으로 고안한 것이 이른바 ‘전기고문’이었다.
- 피의자 입을 열게 하려고 전기고문을 했다는 건가.
▲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게 있다. 당시 전기고문의 실체는 내가 취미삼아 만든 모형 비행기 모터에서 뺀 ‘AA 건전지 2개’라는 점이다.
- 건전지 2개로 전기고문이 가능한가?
▲ 그래서 고문이 아니라는 거다. 그때 김근태씨를 앞에 두고 두 시간 넘게 일부러 말로 겁을 줬다. “너 같은 녀석은 전기구이를 해 버려야 바른 말을 한다”는 식으로 상대를 주눅 들게 한 것이다. 한참후에 눈을 가린 뒤 맨 발바닥에 소금물을 뿌리고 건전지 두 개를 대며 계속 겁을 줬다. 이미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찌릿찌릿한 감각이 느껴지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나.
- ‘잔혹한’ 전기고문에 대한 증언은 또 있다. 민병두 전 민주당 의원은 과거 언론 기고문에서 “이근안은 잡지 ‘선데이서울’ 보면서 전기고문의 볼트수를 올렸다 내렸다”라고 밝혔었다.
▲ 손가락만한 건전지 2개가 전부인데 어떻게 전압을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 2005년 여주교도소 수감 당시 김근태 당시 복지부장관과 독대하며 과거의 잘못을 사죄했다고 알려졌다. 이것도 사실이 아닌가?
▲ 어느 날 교도소장이 불러서 갔더니 “복지부 장관이 영감님 면회를 오신다는데 한번 만나보라”고 하더라. 현직 장관이 직접 온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나. 변호사들이 수감자를 만나는 ‘특별접견실’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니 김 장관이 들어왔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지날 일은 죄송하게 됐다”고 하자 김근태 장관이 양팔을 벌려 포옹을 해왔다. 그리고는 “그게 어떻게 개인의 잘못이냐. 이 시대가 낳은 비극 아니냐”며 위로를 건네는 게 아닌가. 솔직히 ‘정말 그릇이 큰 양반’이라고 느꼈다.
- 당시 언론에는 ‘눈 감을 때까지 용서를 구할 것’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 등의 내용이 실렸다.
▲ 김근태씨에게 종교에 심취해 있다는 나의 근황을 전하며 로마서 3장10절(기록 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나니)을 인용했다. 그랬더니 사흘 뒤 신문에는 내가 무릎을 꿇고 빈 것으로 묘사됐다. 사실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무릎을 꿇거나 큰 절을 올린 일은 없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고 ‘붓쟁이’들의 말장난에 웃었다. 동료 수감자들은 ‘김근태가 영감님을 이용해 정치적 쇼를 한 거 아니냐’고도 했다. 하지만 김근태씨가 그곳까지 날 만나러 왔을 때는 정말 과거의 앙금을 털어버릴 뜻으로 오지 않았겠는가. 지금도 김근태씨가 정략적으로 날 이용하기 위해 만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얕은 수를 쓸 사람은 아니라고 느꼈다. 이후 김근태씨가 내 특별사면을 건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면은 불발됐지만 차라리 형기를 모두 채우고 출소한 게 다행이었다. 마음의 짐을 하나라도 덜은 셈이니까.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 재직 당시 간첩검거에 능했다. 실제 잡아들인 간첩단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 그건 국가기밀이다. 당시 남한에는 북한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간첩이 상당히 많았다. 공식적인 간첩검거 유공은 4건이지만 실제는 그보다 훨씬 많다는 것 정도만 밝히겠다.
- 2000년대 이후 이른바 ‘조작간첩’ 사건이 불거지며 상당수 인사들이 무죄를 선고받거나 민주화인사로 승격됐다. 이중엔 직접 담당했던 사건도 적지 않다.
▲ 일일이 할 말은 많지만 이 자리에서는 밝히지 않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피의자들의 혐의를 입증할 물증이 충분했다는 점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그때 수사기록은 모두 쓰레기가 됐다.
- 평생을 ‘고문기술자’로 불리며 숨어 지냈다. 시간을 돌려 과거로 간다면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 아니다.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애국’이었으니까.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고문기술자’라는 명칭에 대한 솔직한 심경은.
▲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니다.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심문 기술자’가 맞을 것 같다. 논리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이와 이를 깨려는 수사관은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인다. 속된 말로 ‘선수끼리’의 대결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비록 나는 그 예술을 아름답게 장식하지 못했지만.
===========================
'고문기술자' 만난 김근태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김형원 기자 2011.12.31
설 연휴를 앞둔 2005년 2월7일이었다. 이날 고(故)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여주교도소에서 자신을 고문했던 이근안 전 경감을 만났다.
일부 언론은 김 고문이 이
만남으로 이근안 전 경감을 용서했다고 보도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용서하고 싶어했을 따름이다. 김 고문은 ‘고문기술자’를 만나고 돌아온지 13일 뒤인 2월20일 자신의 미니 홈피에 “그를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진정으로 하늘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고 적었다.
이 고문은 1985년 서울대 깃발사건의 배후 조종 혐의로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에 끌려가 11차례에 걸쳐 고문을
당했다. 칠성판(고문대) 위에서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았다. 전기고문을 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긴 채로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 등에 전기가 잘 통하게 물을 뿌렸다고 한다. 전기고문의 고통에 대해 김 고문은 “발끝에서
고통이 시작돼 머리끝까지 쑤시고 혀를 이빨로 깨물 정도”라고 했었다.
20년 만에 이 전 경감을 만날 때만 해도 김 고문은 그다지 내켜 하지 않았다. 이 전 경감을
만나게 된 데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당초 김 고문은 여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이상락 전 의원을 면회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이근안 전 경감도 수감돼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이근안 전 경감을
만날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김 고문은 “이근안씨가 이 전 의원이 있는 여주교도소에 함께 있다는 얘기가 뒤늦게 떠올랐다”면서 “비서관에게 안 갈 수
없느냐고 묻고, 내키지 않는다고 했다”고 말했다.
여주교도소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오면 옹졸한 사람,
국민 대통합을 주장하면서도 막상 솔선수범하지 않는 사람이 될까 봐 저어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내키지 않았다고 했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다고 회고했다. 면회를 가는 당일 오전까지 망설였다. 결국 이 전 경감이 동의하면 면회를 하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났다. 두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김 고문은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왔다”고 전했다.
이 전 경감이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는 모습을 보고 “고맙다”고도 했다. 하지만
마음속까지 흔쾌하지는 않았다.
“저 사죄가 사실일까. 남영동의 책임자였던 박처원 씨의 치사한 배신에 분노하고, 권력에 의해 토사구팽당했다고 말하는
저 말 속에 짐승처럼 능욕하고 고문했던 과거에 대한 진실한 참회가 과연 있는 것일까. 중형을 받을까 봐 충분히
계산해서 나에 대한 고문범죄의 공소시효가 지난 시점에서야 비로소 자수했던 저 사람의 저 말에 대해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의구심이 꼬리를 물었다. 김 고문은 이 전 경감이 ‘눈물을 흘리면서 얘기하는지, 또 어느 정도 흘리고 있는지’를 보고
있었다고 했다. 이 전 경감을 만난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 “무엇보다 내
마음이 잘 정리되지 않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한 번의 만남은 강렬했다. 김 고문은 이 만남 이후 혼란을 느꼈고 입술이 부르틀 정도로 밤잠을 설쳤다. 그는 자신의 미니홈피에
“이제 지나가고자 한다. 정말로 넘어가고자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고 썼다.
======================
김근태 육필 항소이유서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311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