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민주화의 길’을 함께 걷기
- 한인섭 교수
[교수칼럼]서울대학교 홍보팀2009-10-14
학생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같이 교정을 거닐면서 서울대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우리 대학도
60년이 넘었고, 관악캠퍼스가 자리잡은 지도 35년을 헤아리니, 이야깃거리도 풍성합니다. 캠퍼스의 여기저기에
우리 현대사가 숨어 있거든요. 이제 서울대가 민주화에 어떻게 기여했던가에 초점을 맞추어 안내역을 하려 합니다.
요즘
캠퍼스,
무척 평화롭지요. 20여 년 전의 캠퍼스 풍경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최루탄 안개가 자욱하고, 경찰이 교내로 들어와 학생을 잡아가곤 했습니다.
언제부터 경찰이 진입하지 않게 되었을까요? 1987년부터입니다. 그 해 무슨 일이 있었나요? 바로 6월민주항쟁이라고 하는,
군사독재를 끝장내자는 국민항쟁이 폭발했던 해입니다.
그
항쟁은 서울대와 직결됩니다.
언어학과 박종철 학생이 경찰의 대공분실에 끌려가, 물고문당하고 질식사했습니다.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수사관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음도 억울한데, 진상을 저토록 은폐하는 모습에 격분한 국민들이 저 정권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정권이니 몰아내야 한다고 싸웠습니다. 6월민주항쟁을 압축하는 구호가 “고문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박종철 사건은 바로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 박종철의 기념비는 2기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박군의
사건이 민주화의 전환점이었다면,
그 출발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1960년
4·19혁명입니다.
이승만
초대대통령은 대통령 중임제한의 철폐와 부정선거를 통한 영구집권을 획책했습니다. 그에 대한 반대투쟁은 그 해
3·15 마산에서 시작되어, 4월
19일에 전국적 규모의 학생-시민 봉기로 폭발합니다. 서울대가 종로에 있을 때입니다. 동숭동에서 출발해 광화문 네거리까지 학생들이 진출하여 독재정권
타도를 외쳤습니다. 이어 대통령관저인 경무대까지 진출하자 경찰은 조준 발포를 했습니다.
200명 가까운 시민들이 희생되었는데, 그 중 서울대 학생들이 6명이었습니다.
4·19가 민권의 승리로 끝난 뒤, 각 단과대학에서는 쓰러진
학우를 기리는 추모비를 세웠습니다. 캠퍼스가 관악으로 이전하면서 4·19기념탑도 함께 왔습니다. 이전할 때(1975년)는 유신독재가 한창일 때라, 4·19탑을 교정 구석에,
즉 지금의 신공학관 근처에 방치하듯 두었습니다. 그 탑이 현재의 위치,
정문쪽 언덕으로 옮겨진 것은 2002년 이후였고, 이제는 학교 차원에서 추모식을 갖습니다. 4·19탑의
위치가 민주화의 바로미터인 셈이지요.
4·19탑을 위시하여 민주제단에 헌신한 동문들을 기리는 기념물들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모두 16기 정도 되고, 죽 돌아보는데
2시간 정도 걸립니다. 두어 개만 소개해볼까요.
농생대
옆에
<김상진 추모비>가 있습니다. 김상진
선배는 유신독재 시절에 <양심선언>을 발표하고 할복자살을
통해 항거했습니다. 그 때는 겨울공화국이라 불리는 살벌한 시절인지라, 저항도 극단의 형태를 띠었던 것이지요. 그 양심선언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양심선언의 전문을 동판에 새겨 놓았네요.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우리는 어제를 통탄하기 전에···일당독재의 아성을 향해 불퇴진의 결의로 진격하자”는 내용을 포함해서요.
돌이켜보니
서울대는 민주투사의 요람이기도 했습니다.
30여 년간의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제명된 학생이 무려 730명(그 중 대다수는 구속), 무기정학 681명,
유기정학 496명입니다. 다른 대학들의 징계
전체를 합한 숫자와 거의 맞먹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투사가 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요?
한번 데모하면 학사제명에다 징역 3년이 최소한인데요. 당시 학생들은 대학 다닌다는 것 자체로 대단한 심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험한 세상 아프게 겪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세상을 떠난 이도 있습니다. 국문학과 박혜정 학우가 그랬습니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반성하지 않는 삶, 아파하면서 살아갈 용기가 없는 삶, 이 땅의 불의와 억눌림을 방관하는 삶. 부끄럽게 죽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자살로 도피해버린다고
욕하라. 욕하고 잊어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여린 감수성으로 아픈
시대를 드러내었기에 오히려 잊을 길 없던 동료들이 조그만 추모비를 세웠습니다.
학내의
기념물들은 각기 사연을 갖고 있습니다.
조그만 정성이 모여 하나하나를 조성한 것이지요. 어떤 것은 슬픔으로,
어떤 것은 분노로 차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은, 이들의 헌신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염원을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과거의
경험은 현재의 기억을 통해서만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이런 취지에서 민주화 기념물들을 순례하는
‘서울대 민주화의 길’을 조성할 예정입니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면서 우리 민주주의가 어떻게 가능했던가 생각해보고,
서울대생이 된다는 것이 어떤 역사적 무게를 이어받고 있는가도 느껴보기 바랍니다.
4·19탑에 새겨진 한 구절로 오늘 안내를 마치겠습니다. “상아탑은 진리의 탐구자요 정의의 수호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