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진보의 꽃’인가, ‘계파 갈등의 시녀’인가?
통합진보당 부정 경선 파문…“자충수,
억지, 꼼수” 평가도, 심원섭 기자, 2012-05-14
19대 총선 비례대표 부정 경선 의혹으로 촉발된 통합진보당
내분이 갈수록 가열되고 있다. 비당권파는 경선에 참여한 비례대표 당선자 및 후보 총사퇴를 주장하고 있는 반면,
당권파는 진상조사 보고서를 믿을 수 없다며 버티는 등 좀처럼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통합진보당의 갈등의 원인이 표면적으로는 비례대표 경선을 둘러싼 것이지만 내면을
살펴보면 해묵은 계파 갈등이 폭발한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통합진보당은 민주노동당(NLㆍ자주파)과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PDㆍ진보신당 탈당파)가 만든
정당으로서 민노당 계열은 경기동부연합과 광주전남연합, 인천연합, 울산연합으로
구성돼 있다. 따라서 현재 전선은 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
민노당 출신의 인천ㆍ울산연합 출신으로 구성된 비당권파가 경기동부연합과 광주전남연합을 중심으로 한 당권파에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는 구도로 짜여 있다.
따라서 최근에 불거진 갈등은 다음달
3일로 예정된 지도부 선출대회와 조만간 치러질 것으로 예상되는 당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당권파와 비당권파가 헤게모니
쟁탈전을 하는 양상이라는 관측도 있다.
현재 당내 의사결정기구인 전국운영위원회와 중앙위원회는 민노당
55%, 참여당 30%, 새진보통합연대 15%의 비율로 구성돼 있지만, 민노당
내 인천ㆍ울산연합이 비당권파에 합류함으로써 비당권파의 세력이 더 많다는 게 양 진영의 공통된 시각이다.
따라서 이번 사태를 지난 2008년 민노당 내 NL(민족해방)계와 PD(민중민주)계의 갈등의 재연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당시
PD계는 NL계의 종북주의와 패권주의에 반발하며 민노당을 탈당해 진보신당을 창당한
바 있다.
이정희, 하루 만에 사과발언 뒤집어
갈등의 출발점은 지난 5월 2일 진상조사위원회가 이번 4ㆍ11 총선에서 비례대표 후보 선거에 대해 “선거관리 능력 부실에 의한 총체적 부실, 부정선거”라고
규정한 데서 출발했다. 그러나 당권파는 “보고서를 믿을 수 없다”며 전면 재조사를 주장하며 반발했다.
당권파의 반발 이유는 “의혹의 당사자에게 소명 기회를 주지 않았고,
동일 IP에 대한 중복투표 조사는 당권파인 비례대표 이석기 당선자를 겨냥해 이뤄졌으며,
현장투표 조사 결과에 대한 의혹을 부풀렸다는 의심을 벗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당권파는 “조사 과정에서 일부 미진한 부분이 발견됐다고 해도 이번 선거에 총체적인 부실이 있었다는 적시는 부인할 수밖에 없다”고
맞섰다.
이에 비당권파는 “당권파가 진상조사위에 전권을 부여하기로 합의해놓고 불리한 결과가
나왔다고 조사결과를 부인하고 있다”며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이정희 공동대표에 대해 “상황에 따라 입장을 달리하면서 말을 바꾸는
행태를 반복하는 등 상식을 뛰어넘는 당권파의 ‘막무가내식’ 대응과 같은 맥락”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이 대표는 5월 3일 국회에서 열린 대표단 회의에서 “상황과 이유가 어찌 됐든 통합진보당의 재기를 위해
가장 무거운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며 “온라인투표 관리 부실, 현장투표 관리부실과 부정은 심각한 잘못이며
국민 여러분과 당원들에게 깊이 사죄드린다”고 밝히면서 머리 숙여 사과했다. 여기까지는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따라서 국민의 관심은 통합진보당이 앞으로 어떤 수습책과 쇄신방안을 내놓을지 기대했다.
그러나 이 대표는 다음날인
4일 오후 열린 통합진보당 전국운영위원회에서 부정ㆍ부실투표가 있었다는 당 진상조사위의 조사 결과가 잘못됐으며 이로 인해
당원들의 명예가 실추됐다고 역공을 강행하면서 전날 취했던 반성의 자세를 갑자기 뒤집었다.
이 대표의 태도와 말이 돌변했기 때문에 통합진보당 홈페이지를 통해 중계된 동영상을
본 사람들은 눈과 귀를 의심했다. 이 대표는 투표 관리부실과 부정은 심각한 잘못이며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고 했던 전날의 발언을 까맣게 잊은 듯 했다.
의장직 사퇴도 “당시 감상적 상태” 번복
특히 이 대표는 지도부 및 비례대표 당선자 사퇴에 대한 표결을 할 수 없다고 버티며
진상조사위의 조사가 잘못됐다는 점만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더구나 이 대표는 의사진행을
맡은 의장으로서 전국운영위 안건에 대한 토론과 표결절차를 끝내 진행하지 않은 채 조사위 보고서에 대한 질의응답만 유도하며 시간을 끌었다.
진상조사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할 만큼 했으니 회의규칙에 따라 표결로 넘어가자는
운영위원들의 호소와 독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동안 각종 토론 프로그램 등에서 보여준 명석하고 논리정연한 언변을 토대로 시간을 끌어 온라인 중계를
본 사람들은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똑똑한 이 대표였지만 이날 회의장에서 보여준 말의 논리는 논리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편협했다는 지적이 지배적이었다. 변호사 출신의 그가 같은 의미의 말을 계속 되풀이한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말에 어떤 한계가 있었다는 방증이었다.
또한 이 대표는 5월 5일 전국운영위원회에서 “당의 공식석상에서 말씀드리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의장직
사퇴 의사를 드러냈으나 5월 7일 열린 대표단 회의에서는 “5월 10일 열리는 전국운영위 의장직을 다시 맡겠다”며 입장을 번복했다.
그리고 이 대표는 “(사퇴 의사) 당시엔 마지막 회의인 줄 알았고 매우 감상적인 상태였다”라는 핑계를 대기도 했다.
이에 심상정, 유시민 공동대표 등 비당권파 측은 “당권파에게 유리한 쪽으로 회의를 진행하기 위해 이 대표가 말을 바꾸며 꼼수를 부리고 있다”고
강하게 반발하는 입장을 드러냈다. 이 대표가 부정선거 가능성은 일부 인정하면서도 정치논리로 사퇴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지적도 뒤따랐다.
이 대표는 5월 9일 CBS 라디오에 출연해 “현장투표에서 부정이
일부 있었을 개연성이 매우 커 보인다. 이 점에 대해서는 무척 죄송하다”면서도 “그러나 부정덩어리로,
통합진보당 당원 전체, 당 전체가 오명을 뒤집어쓸 정도는 아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대표는 비례대표 부정경선 파문에 대해서는 “전면 재조사가 이뤄지지 않으면
당내 화합 가능성이 굉장히 적어질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는 게 비당권파들의 주장이다. 뿐만 아니라 이 대표는 “당 내부에서 만들어낸 오명이기 때문에 당이 무너졌다”며 진상조사위원회에 책임을 돌리면서, 부정선거 논란에 대해 전면 재조사를 거듭 촉구하는 대응을 계속했다.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다.
진보진영 인사들도 분노와 실망 표출해
또한 이 대표가 부정투표 개연성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조사 방식이 부실하기 때문에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억지를 부린다는 지적도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이 대표는 학력고사에서 인문계 여자 전국수석으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고,
사법고시를 거쳐 변호사를 지낸 인물로서 똑똑함과 논리적인 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수재급이다. 따라서 바보가 아닌 이상 통합진보당이 처한 현실이 어떤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리 없으며 특히 국민 여론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당권파의 논리를 반복했다
이 대표는 왜 돌변했을까.
이 대표에게는 지금까지 ‘헌정 사상 최연소 정당대표’ ‘진보의 아이콘’ ‘국회의원이
뽑은 후원하고 싶은 여성 정치인 1위(2009년)’ ‘차세대 여성리더 300인 중 1위(2010년)’ ‘트위터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 1위(2011년)’ 등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어 다녔다.
이처럼 진보 정치인으로는 보기 드물게 화려한 정치 활동을 펼쳐 온 이 대표가 이번
경선 부정 문제를 놓고 비당권파와 극도로 대립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당권파의 기득권 지키기에만 몰두하는 ‘패권파’ 이미지에 갇히면서 추락한 셈이다.
특히 이 대표의 이러한 ‘돌출행동’에 진보진영 인사들도 분노와 실망을 표출했다.
시사평론가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5월 10일
자신의 트위터에 이 대표가 전국운영위 의장직을 다시 맡겠다고 말을 번복한 것과 관련해 “끝까지 지저분하게 군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라며 “의장 사퇴 약속을 번복하고 다시 의장직 맡아 필리버스터 할 겁니다. 이정희 대표, 순진한 당원들의 실수라고요?”라고 되물으며
비난했다.
진보 진영 논객을 자처하는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6일 트위터에서 “계파의 이익이 당의 이익을 압도, 지배하는 것, 정당 바깥 진보적 대중의 눈을 외면하는 것은 망하는 지름길”이라고 꼬집은 데 이어, 9일 트위터에서도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으로 통합진보당 진상조사위원장을 맡은 조준호 당 공동대표, 진상조사 발표에 부정하는
당권파 비판. 제발 좀!”이라며 통합진보당 당권파에 대해 막막한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한인섭 서울대 법학과 교수도 이 대표의 모습에 대해 “당권교회의 부흥사로
전락하는 듯…”이라고 비판하며 “무죄추정 역설하니 변호사로 돌아오시죠. 지켜보는 사람이 더 민망하군요”라고 강하게 질타했다.
김세균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도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정희 의장 사퇴 번복,
중앙위 회의 사퇴 막겠다고 나섰다. 왜 이러나. 당권파를 위한 순교자라도 되겠다는 각오인가”라며 “제발 더 망가지지 말라”고 충고했다.
특히 이 대표의 18대 의정활동과 관련해 “여자 대통령감이다” “가슴과 영혼으로 일하는 느낌을 준다. 13대 국회의
노무현 의원을 보는 듯하다” 등등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민주통합당 이해찬 상임고문 5월 10일 전남대 강연을 위해 광주를 찾은 자리에서 “상식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사태가 발생했다”며 혀를 내두르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이 대표는 현재 ‘안타깝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진보 진영의 대부분의
논객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있는 모습이다. 보수, 진보
언론을 가리지 않는 공격으로 이 대표 스스로도 앞으로 당분간 자신을 추스르기 힘들 정도로 심정이 괴로울 것이라는 얘기도 들리고 있다.
“당권파의 몸통 따로 있고,
이정희는 깃털?”
여기에다 진보언론 ‘참세상’이 최근 “인권변호사로 알려진 이 대표가
2007년 D법무법인 변호사로 재직하면서 노사분쟁 관련 소송에서 사측 변호사를 맡아
사측 논리를 대변했다”고 폭로함으로써 항상 노동자들의 편에 서 왔다는 이미지에 적지 않은 상처가 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 대표를 잘 알고 있다는 한 정치권 인사는 “오랫동안 키워진 NL계 대중정치인이
어떻게 단 몇 주 만에 이렇게 무너질 수 있는지 안타깝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이 대표는 앳되고 연약한 외관과 달리 당 관리에서도 강인하고 인상적인
모습을 남겼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평가다. 특히 한미FTA, 한진중공업 사태,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문제 등 굵직굵직한 사안마다 이 대표는 몸을 던지는
자세를 보였으며, 심지어 2009년에는 미디어법 처리를 막다 이은재,
정옥임 등 새누리당 의원들에 의해 끌려 나가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한진중공업 사태 해결을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최루액을 맞고
혼절을 거듭하면서도 악을 쓰는 모습이 여러 차례 사진에 포착됐을 정도로 뚜렷한 의정활동을 벌였다.
이렇듯 이 대표의 의정활동이 치열해지는 만큼 진보정치권 내에서 그에 대한 대중적 지지도 커져갔다. 이 대표는 지난해 말에는 국민참여당 및 진보신당 탈당파와 통합해 통합진보당을 만들어내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물론 통합진보당이 만들어질 때도 이 대표를 둘러싼 뒷말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진보신당과 민노당이 통합을 위해 협상하는 과정에서 이 대표가 어떤 사항을 합의를
해놓고도 당권파와 논의를 하고 돌아온 뒤에는 합의 내용을 자꾸 뒤집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런 정황들 때문에 이 대표는 ‘기획 상품’일뿐 실권이 없고 모든 것을 베일에 가려진 실세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처지라는 얘기에
무게가 실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