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불혹이 넘어 말하는 나
―“너무 늦지 않게, 너무 빠르지 않게. 반쯤 빠르게!”―

부모세대에 대한 빚

나는 1965년 교사 부부의 장남으로 부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하 경남의 중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중, 고교를 마친 후, 형을 따라 사관학교에 들어가라는 할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치고 서울로 유학을 떠나 입주가정교사를 하는 방법으로 고학을 하며 대학을 졸업하셨다. 양복을 살 처지가 되지 않아 군복을 검게 물들여 입은 빛바랜 사진 속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 감회가 일어난다. ‘촌놈’으로 서울에 올라와 대학의 학생회장을 하셨지만 청운의 꿈을 접으셔야 했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어머니는 일제하 황해도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직전 온 가족이 서울로 월남하셨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온 가족을 새끼줄로 연결한 채 기차 지붕 위에 올라타고서 며칠이 걸려 생면부지의 경남까지 피난하셨고, 이후 중고교시절부터 동생들을 챙기며 혼자 힘으로 부산에서 대학을 마치셨다.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서울 유학도, 청소년 시절부터 하고 싶으셨던 미술공부도 다 포기하시고 장학금과 기숙사를 제공하는 전공을 택하셨을 때 마음이 쓰리셨으리라.
두 분은 분단, 전쟁, 장기간의 권위주의 체제, 급속한 경제발전과 사회변동을 경험하면서 살아오셨다. 머리가 크고 난 후 부모님의 과거 모습을 하나하나 생각해보니, 다음 세대인 우리가 이전 세대에게 얼마나 빚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우리 세대는 부모 세대가 이루어놓은 것을 당연히 또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 과실만 따먹으며 살았던 것은 아니었던지.
문득 어린 시절 술을 한 잔 하시고 귀가하시면서 나의 볼을 비비실 때 아버지의 몸에서 풍기던 술과 담배 냄새가 떠오른다. 그리고 어느 늦가을 자식이 차가워진 도시락을 먹을 것이 안쓰러워 점심시간에 맞추어 어머니가 들고 오셨던 양은냄비 속 김치찌개 냄새가 그립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친구들과 집 뒤의 구덕산(九德山)에서 신나게 뛰어 논 기억이 거의 전부이다. 어느 날 봄 이웃의 동무들이 갑자기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는 부모님을 졸라 초등학교에 조기입학하였다. 이후 초년의 개구쟁이 기질은 사라지고, 학교생활을 줄곧 ‘모범생’으로 보냈다. 무덤덤하고 밋밋한 청소년기였으나, 닥치는 대로 종류불문의 책을 읽고 생각하는 낙이 있었다. ‘10.26’을 초래했던 ‘부마사태’를 가까이서 직접 목도하면서 새로운 고민이 생기기 시작하였으나, 큰 탈 없이 1982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육법당’은 되기 싫었다.

80년대 초반 나는 하버드 법대 생활을 묘사한 소설 『The Paper Chase』이나 『One L』에서와 같은 법대생의 삶을 살 수는 없었다. ‘5.18’의 참혹한 소식이 은밀히 전해오고, 학생과 ‘백골단’ 중 누가 캠퍼스의 주인인지 혼동되던 시절, 헌법은 휴지 조각 또는 장식적 허언(虛言)에 불과하고 형사법은 강압적 통치의 도구에 불과하던 시절, ‘민주주의여 만세’를 토해 낸 김지하와 ‘노동의 새벽’을 울부짖던 박노해의 절창(絶唱)이 온 몸으로 느껴지던 시절, 그리고 ‘아침이슬’과 ‘임을 위한 행진곡’이 사실상의 애국가였던 시절이었다. 많은 친구와 지인들이 학생회를 만들었다고, 또는 군부독재를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고 감옥으로, 군대로 끌려가야 했던 암흑의 시절, 사법시험 1, 2차에 합격한 선배들이 학생운동 참여를 이유로 하여 ‘국가관 불량’이라는 판정을 받고 3차 시험에서 떨어져야 했던 황당한 시절, 내가 군사독재에 봉사하는 ‘육법당’(陸法黨)의 일원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서, 법학공부에 몰두하지 않은 채 학생운동 대오의 후미에 서서 사회과학 및 근현대사 공부, 교내외 시위, 법대 편집실 활동, 농촌활동 등을 수행했던 것은 단지 나의 경조부박(輕?浮薄)하고 편벽한 천성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당시 나에게 법학은 “빵을 위한 학문”(Brotwissenschaft) 또는 “법률가의 트릭”(Juristerei)으로만 보였다. 당시 반독재시위 중 법대 건물 앞에 세워져 있는 ‘정의의 종’을 치며 소리를 내는 것을 막기 위해 학교 당국은 종추가 때버렸던 바, 울리는 못하는 정의의 종은 당시 정의의 모습을 알려주는 상징이었다. 암울한 시기였으나 시각과 입장 차이를 떠나 좋은 벗들을 사귈 수 있었던 점은 행복했다. 그리고 서울대 법대 학술지 편집실 편집장으로 활동한 것은 이후 나의 삶을 위한 시원적(始原的) 자양분이 되었다.

학문의 길을 택하다.

상당 기간 동안 법과 법학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회의에 빠져 있었던 나는 인권과 헌법상 기본권의 의미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조영래 변호사 등 ‘인권변호사’들의 선구적 활동을 목도하고, 평민의 입장에서 인도주의 형사법의 기초를 놓은 베카리아(C. Beccaria)의 저작, 1960년대 ‘형사법혁명’을 추동(推動)한 미국 워렌(E. Warren) 연방대법원의 판결문 등을 접하게 된 것이 중요한 계기였다, 이후 학자의 길을 걷겠다고 감히 결심했다.
1987년 1월 14일 고교 및 대학후배였던 박종철이 남영동 치안분실에서 용의자도 피의자도 아닌 참고인의 신분으로 연행되어 고문·살해당하였다는 소식에 치를 떨며, 그해 3월 모교 대학원에 입학했다. 대학원에 입학하자 곧 발발한 '6.10 민주항쟁'을 거리에서 맞이하였다.
대학원에서는 국가형벌권의 발동 근거, 논리와 작동 절차를 연구하는데 몰두했다. 형사법 공부와 별도로 여러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형식적 평등 속에 실질적 불평등을 감추고 있는 근대법에 대한 맑스(K. Marx)의 비판에 공감했고, 합리성의 이름 하에 인간의 정신과 몸에 대한 지배를 도모하는 근대법에 대한 푸코(M. Foucault)의 해부에 전율했다. 국가주의와 권위주의에 맞서 자유와 비판의 정신에 입각하여 대학과 교수의 역할을 정립한 막스 베버(M. Weber)의 고고한 정신에 감동했고, 공리주의의 맹점을 비판하며 ‘정의론’의 새 지평을 연 롤즈(J. Rawls)의 통찰을 가슴에 간직했다. 대학원 공부와 병행하여 틈틈이 ‘노동야학’에 출강하며 지식인의 ‘흰 손’으로 인한 자책감을 조금이나마 덜려고 했고, ‘천민자본주의’(vulgar capitalism)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좌파 운동이 내미는 연대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
돌이켜 보건대 당시 나는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의 이행기 속에서 (법)학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법)학자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며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형사절차에 대한 ‘참여관찰’의 행운

1992년 3월, 설익은 자질과 부족한 공부에도 불구하고 울산대학교에서 전임강사로 부임하여 학생들과 즐거이 어울리며 ‘병아리 교수’ 생활을 시작했으나, 흐려진 마음의 거울을 닦고 부족한 공부를 보충할 계기가 예기치 않게 생겨났다. 1993년 6월, 대학원 시절 사노맹이라는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활동을 하여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사노맹은 이미 자진 해체되어 있었는데 말이다.
‘문민정부’는 출범했지만 당시 형사사법체제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 원칙으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법리를 수용하지 않고서, 체제를 위협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표현”이기만 하면 처벌하고 있었다(예컨대, 대법원 1992.3.13. 선고 90도2033 판결). 반면 ‘앰네스티 인터내셔널’(Amnesty International)은 즉각 나를 ‘양심수’(prisoner of conscience)로 지정해 주었다. 별 한 일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진 과분한 호칭이었다.
형사절차의 전 과정을 몸으로 경험하면서 “사가살 불가욕”(士可殺 不可辱)이라는 『예기』(禮記)의 언구가 머리를 스칠 때가 있었지만, 80년대에 진작 당했어야 할 일을 ‘늦깎이’로 치른다는 마음으로 자위하였다. 그러나 형사법 전공학자로서 형사절차를 꼼꼼히 ‘참여관찰’(participatory observance)하며 ‘현장실습’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그리고 구치소 ‘파놉티콘’(panopticon)형 체육시설에서의 달리기, 다른 국가보안법 사범들과의 ‘통방’(通房), 그리고 온갖 종류의 범죄를 범한 수인들과의 대화 및 그들에 대한 관찰을 소중한 추억으로 지니고 있다. 나와 같은 통로에 배치되어 각각 독방을 쓰면서 휴식시간에 과자를 나누어먹던 “빨간 딱지”의 사형수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버클리 유학―“Go Bears!”그리고 “Kill Your Father!”

집행유예 선고로 석방된 후 ‘일주학술문화재단’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1994년 8월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교 로스쿨로 늦은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동부 쪽의 ‘아이비 리그’(Ivy League) 보다는 버클리를 택한 것은 캘리포니아의 태양 때문만은 아니었다. 버클리의 리버럴(liberal)한 학풍과 저렴한 학비가 그를 유혹하였던 것이다. Go Bears!
천학비재(淺學非材)로서 논문준비 외에 2년간의 필수적 코스 워크 과정에서 이른바 ‘소크라테스식 수업’과 필기시험을 치러야 했기에 캘리포니아를 많이 즐기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미국 형법학계의 거목인 샌포드 캐디쉬(S. H. Kadish) 교수, 형사사법체제에 대한 법사회학적 분석에 일가를 이루신 말콤 필리(M. M. Feeley) 교수 등의 수업을 듣고 세심한 지도를 받으면서 형사법학 방법론을 재정립할 수 있었던 점, 품격을 잃지 않는 수준 높은 논투(論鬪)의 보고(寶庫)였던 미국 연방대법원 판례 속에 헤엄칠 수 있었던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특히, 내가 대가의 이론 앞에서 머뭇거릴 때면 필리 교수는 “Kill your father!”이라고 조언하며 독려해주셨다. 쉬는 시간에는 학교 구내 카페 벽면에 걸려있던 워렌 연방대법원장의 대형초상화 밑에 앉아 그와 ‘대화’를 나누어 보려고 애썼다. 동시에 연방대법원 판결의 ‘보수화’를 이끌었던 렌퀴스트(W. H. Rehnquist), 스칼리아(A. Scalia) 대법관 등의 ‘보수적’ 문제의식을 탐구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시기의 공부와 사색은 내가 한국 (형사)법을 바라보는 시각을 재정립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음에 분명하다. 1997년 12월 박사학위 취득 후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과 리즈 대학에서 방문학자로 연구하며 미국 형사법 원리의 뿌리인 영국 (형사)법 이론을 맛보았다.
돌이켜보면 미국과 영국에서의 유학은 영미법학에 대한 공부의 기회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현시대 ‘로마제국’의 빛과 그림자를 직접 느끼는 계기를 제공했다. 보다 중요하게는 자기 자신과 학문, 그리고 조국(祖國)을 냉정하게 돌이켜 볼 수 있었기에 소중한 시절이었다.
귀국 후 1999년 3월 고맙게도 울산대학교에 조교수로 다시 채용되었다가, 2000년 3월 동국대학교와 인연이 되어 법향(法香)을 느끼게 되었고, 2001년의 마지막 날 모교의 교수로 채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용속(庸俗)한 ‘전과자’ 후학을 음양으로 격려·지원해주시고 포용해주신 여러 스승님과 선배 교수님 덕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40여년의 삶을 살면서 이익추구를 위한 인간의 본성을 직시하고 시장의 중요성을 인정하기에 나는 ‘자본주의자’이다. 그러나 이 자본주의는 치명적 모순을 내포·발전시키고 있음을 알고, 이 모순의 해결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사회주의자’이다. 그리고 시민의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국가의 침해와 간섭에 예민하다는 점에 나는 확고한 ‘자유주의자’이다. 국가와 법의 속박을 벗어난 인민(people)의 탈근대적인 자율공동체를 그려본다는 점에서 나는 ‘아나키스트’ 또는 ‘꼬뮨주의자’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나는 분단은 남북한의 제대로 된 발전을 왜곡하는 핵심원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며, 다른 어떤 나라도 아닌 남북한이 중심이 되어 보다 대규모의 경제협력과 상호교류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자’이다. 그러나 이 민족주의가 타 민족과 인종을 깔보는 한민족 우월주의로 변질하거나, 국제정세와 조류를 외면하는 북한식의 “우리 민족끼리”를 외치는 것은 반대하며, 민주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민족에 우월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나는 ‘국제주의자’이다. 그리고 나는 국가와 사회의 주인, 그리고 역사발전의 근본동력은 인민이라고 믿고, 그 인민의 꿈과 바람이 국가와 사회 속에 실현되도록 만들고자 노력하며, 특권과 우월적인 사회적 신분이 만들어지는 것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인민이 ‘우중’(愚衆) 심지어는 ‘폭중’(暴衆)이 될 수 있음을 직시하고, 인민과 거리를 두는 지성적 비판과 탐구의 독자적 의미를 소중히 여기기에 ‘엘리트주의자’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나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셰익스피어, <리어왕>, 제1막 제4장)라고 항상 자문(自問)하며 회의하는 ‘절충주의자’인가 보다. ‘시인과 촌장’의 노랫말을 빌자면,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다.” 이렇게 자신을 딱 부러지게 어떤 ‘주의자’로 규정하지는 못하지만, 특정 시기, 특정 상황에서 어떠한 내가 필요한지는 직관과 경험으로 알고 있다.

‘불구종 불구묵’의 학인으로 살겠다.

앞으로 나는 ‘불구종 불구묵’(不苟從 不苟默)의 마음가짐을 지니고, ‘발본적’(拔本的, radical)으로 사고하고 탐구하지만 ‘극단적’(extreme)으로 행동하지 않으면서, 부단히 공부하여 아는 만큼 쓰고 말하고, 쓰고 말한 것은 책임지는 학인(學人)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먼저 왜 학문의 자유와 대학의 자치가 헌법상 기본권으로 보장되고 있는지, 또한 그 실천적 의미는 무엇인지를 계속 되새기며 연구와 강학에 임하고자 한다. 현재 나는 형사법을 국제인권법과 우리 헌법정신의 구현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하면서 입법론, 해석론 및 정책론을 전개하는 ‘헌법적 형사법학’을 구축하는 것을 학문적 목표로 삼고 있다. 이 과정에서 2003년 12월 ‘한국형사법학회’가 수여하는 ‘정암(定庵) 형사법학술상’을 받고, 졸저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박영사, 2005)이 2006년도 대한민국학술원 기초학문육성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는 망외(望外)의 행운이 있었다.
앞으로도 학자로서의 책무와 자긍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파우스트』에 나오는 “나의 친구여,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푸르른 것은 저 생명의 황금빛 나무라네”라는 금언(金言)을 잊지 않고자 한다.
다음으로 좌와 우, 동과 서, 남과 북이 서로 인정·비판·경쟁·협력하는 미래를 꿈꾸면서, 지금까지 이루어진 소중한 성과를 제도화하고, 이 제도를 운영할 사람과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사회참여에 임하고자 한다. 이 때 세상은 구호나 설교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성찰과 설득으로 바뀌는 것이며, 자신의 이념과 정책의 올바름은 ‘주장’될 것이 아니라 ‘입증’되어야 하는 것임을 잊지 않을 것이다.
마흔이 넘어 산쵸 판자처럼 일상을 살고 있지만, 행복(!)하게도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미완의 과제가 있기에,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는 돈키호테의 호언은 언제나 가슴을 뛰게 한다.
달려라, 로시난테!
“너무 늦지 않게, 너무 빠르지 않게. 반쯤 빠르게!”
(Louis Armstrong)

<2005.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