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ost on 이해영's Facebook: lessons from Germany's reunification

Hae-Young Lee, March 29, 2014, on his Facebook
  
소위 '통일대박론'의 모델이 독일이란다. 해서 독일 총리 메르켈도 이왕 오신 손님에게 립서비스차원에서 이리 말했다. “독일 통일은 정말 행운이자 대박”이라며 “대박이란 말이 나의 느낌도 반영하고 있고 저 역시 통일의 산물이라고 말씀드리겠다”. 이어 아주 귀담아 들어야 할 말도 덧붙였다. “통일이 되면 모든 상황이 바뀌게 된다. 그 전 다른 삶을 산 사람들에게 개방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부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를 위한 마음의 준비도 필요하다”.
독일말로 Gluecksfall -움라우트를 못찾겠다 ㅎ- 은 그냥 '운좋은 케이스', 행운이란 일상용어다. '대박'을 노다지란 의미인 bonanza 로 번역한다면, 이와는 분명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 어떤 ''이 독일에는 따라 주었나.
1. 구동독 민중의 자발적 저항과 봉기였다.
2. 하지만 잘사는 이웃을 둔 탓에, 'Wir sind das Volk' (우리가 인민이다) '우리가 이 나라의 주인이다'에서 출발했지만 곧 'Wir sind ein Volk' (우리는 '하나의' 인민이다)로 획기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룬다.
3. 선거를 앞두고 있던 레알폴리티커(Realpolitiker), 당시 수상 헬무트 콜등 서독 보수정치의 동독에 대한 매우 신속하고 정교한 개입으로 단 329일만에 구소동구권에서 가장 잘 나가던 국가 하나를 해체후 '폭풍흡입'해 낸다.
4. 여기서 두가지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다. 첫째는 구동독을 '' 수 있는 구서독의 경제력이다.
5. 둘째는 고르바쵸프다. 통일된 강력한 독일의 부상은 인접국에겐 악몽이다. 여기서 고르바쵸프의 승인과 마침 진행중이었던 EU통합에다 독일통합을 '얹어서 슬쩍 끼워넣은'(embedding) 독일외교의 탁월함이 작동한다. 특히 구동독 군부의 저항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고 정리해 준것은 뭐니 뭐니 해도 고르바쵸프다.(그래서 무장충돌이 없었다)
6. 구동독 시민운동에게 통합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가깝다. 하지만 선택은 순응하던지, 그만두던지 둘중 하나였다. 지금 총리 메르켈은 전자의 가장 성공적인 경우다. 후자에게 독일통합은 말그대로 재앙이자 사고Unfall였다. 구동독의 '건강한' 비판세력에게 독일통일은 '식민화'에 다름아니었다는 말이다.
7. 하지만 급하게 먹었는데 소화가 잘 될 리 만무하다. 세금으로 엄청난 경제적 비용을 감당해야 했다. 재주는 구동독 민중이 부리고, 구전은 독일 보수정치가 챙긴셈이다.
8. 그 후의 과정을 좀 아카데믹하게 정리하면, 시스템통합에는 성공했을 지 몰라도, '사회통합'에는 실패한 것이 독일모델이다. 이를 나는 십여년전 <독일은 통일되지 않았다>고 썼다. (아래 책광고 ㅋㅋㅋ) 위 메르켈이 말한 '마음의 준비'라는 지적의 맥락이 여기에 있다.
이 모델을 한반도에 적용해 보자. 1. 북한민중의 자발적 봉기와 이를 지도할 정치(시민)세력 2. 남한의 초막강 경제력 3. 고르바쵸프 역할을 할 자(시진핑?) 즉 북한 군부를 완전 통제할 만큼의 북한내 정보망과 실력을 갖추어 무력충돌을 제어할 자 혹은 세력의 존재 4. 남북한 통일의 국제적 조건, 예컨대 EU에 비견될 동아시아 통합 5. 비용조달을 위한 대규모 증세에 대한 남한내의 사회적 합의.
현재로서 독일모델의 한반도적용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준비되지 않았다. 가까운 미래에 그렇게 될 가능성도 없다. 따라서 그것은 Gluecksfall이 아니라 Unfall(사고, 재앙)이 될 가능성이 차라리 높다.
* 참 아래 책은 안사셔도 된다 ㅎㅎㅎ

Hae-Young Lee : 메르켈에 대해 정치적으로 동의하지 않지만, 요 지적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란 시각이 문제의 본질중에 본질입니다. 우리는 북한 민중의 "다른 삶"을 존중할 하등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거죠. 통일되면 그 저 북한에 있는 우리 조상땅 찾기에 혈안이 될 겁니다. 독일의 경우 이런 내땅 찾기 소송이 200만건 벌어 졌습니다. 만에 하나 통일 되면 독일의 동독출신 여성 정치인 메르켈처럼, 북한 출신 누구에게 권력을 줄 수있을까요. 우리가? 절대 안될 겁니다. 북한출신은 영구낙인이 될 겁니다. 한반도판 주홍글씨라 봐야겠죠

Hae-Young Lee : 독일의 사례로 제가 예측해 보건대 일단 부동산입니다. 평양중심가가 절대 유리합니다. 아 소매상으론 포르노산업이 유망합니다. 통일이후 베를린의 비디오대여점이 대호황이엇으니까요.

Hae-Young Lee : 북한땅 찾기 소송 전문 변호사 분명 나올 겁니다 ㅎㅎ. 근디 독일의 경우 구동독이 독일의 연방에 '가입'하면서 구서독의 모든 사법체계를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에 사실 구동독주민들로서는 황당한 소송이 빈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구동독이 사회주의국가였지만 개인적 소유도 허용되었거든요. 그런 데 통일이후 어느 날 갑자기 서독의 집주인, 땅주인이 나타나 내 놓으라고 하는 거죠. 그런데 구동독의 국가성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구동독국가에 '등기'된 재산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Hae-Young Lee : 만에 하나 '독일식으로 된다면', 북한의 '국가'를 이루는 모든 것 화폐, 은행, 군대, 경찰, 학교, 병원은 물론이고 모든 정부기관은 해체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가담했던 자들은 우리 헌법상 북한은 국가를 '참칭'한 불법집단이기 때문에 전원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겁니다. 피의 숙청이 시작되곘죠 

열차가 입 맞춘 곳에서 '제국' 미국은 시작됐다.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 철도와 미국

열차가 입 맞춘 곳에서 '제국' 미국은 시작됐다.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 철도와 미국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소 철도정책객원연구위원
2014.03.09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5218

동쪽과 서쪽에서 각각 출발한 UP(Union Pacific Railroad, 유니온퍼시픽레일로드), CP(Central Pacific Railroad, 센트럴퍼시픽레일로드)는 온갖 역경을 헤치고 철도를 놓으며 점점 가까워졌다. 두 회사 간의 거리가 줄어들수록 경쟁은 치열해졌다. 유타주 어딘가에서 철도가 만나는 지점이 결정될 것으로 보이자, 두 철도회사는 총력 경쟁 체제로 돌입했다. 경영진들은 정부 고위 인사를 만나 철도 연결 지점이 조금이라도 더 상대방 지역 쪽으로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 로비를 펼쳤다. 노동자들에게 끔찍할 정도로 인색했던 경영진들조차 한 치라도 더 상대편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 하루 일당을 대폭 높였다.

UP의 실질적 대표인 듀란트 부사장의 목표는 무조건 CP를 이기는 것이었다. 듀란트는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내세웠던 표어를 내걸었다. "먼저 이기고 지불은 나중에!". 당장 들어갈 돈을 떠나 자존심을 걸고 철도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각 회사의 최선봉에 선 측량기사들이 상대방 회사의 건설 지역을 지나 측량을 했는데, 이를 본 사람들은 노사 할 것 없이 공사에 전력을 다했다. 아직 본선과 연결되지 않은 공구에서 부설 공사도 진행되었다. 그러다 보니 CP UP가 서로 지켜보며 나란히 선로 공사를 하는 지역도 생겼고 CP의 중국인 노동자들과 UP의 아일랜드 노동자들 사이에 물리적 충돌도 생겼다.

처음에는 UP의 아일랜드 노동자들이 흙덩어리를 던지며 CP의 중국인 노동자들을 놀렸다. 나중에는 작업에 전념하고 있는 인부들 한가운데로 곡괭이 자루를 날리며 심기를 건드렸다. 중국인들이 일하는 현장 근처에서 사전 경고도 없이 폭약을 터뜨려 중국인 노동자 일부가 중상을 입는 일이 발생하자 사태는 심각해졌다. 그러자 중국인들이 폭약을 터뜨려 아일랜드 노동자들 상당수가 생매장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동안 지속된 도발에 몇 배의 이자를 쳐서 한꺼번에 갚아준 것이다. 끔찍한 사고 이후 서로 보복행위는 잦아들었지만 두 회사의 노동자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CP UP가 최종적으로 만나는 지점은, 남북전쟁의 영웅 그랜트가 대통령이 된 첫해에 내려진 결정에 따라 유타주 소금호수 옆 프로몬트리 언덕 정상으로 정해졌다. 두 회사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 프로몬트리 언덕을 향해 선로를 깔았다. 목표지점까지 CP 14마일, UP 9마일을 남겨 놓고 있던 시점에, CP의 경영진 찰스 크로커는 하루에 10마일, 16km의 선로를 놓겠다며 UP의 듀란트에게 1만 달러 내기를 제안했다. 당시 하루 평균 부설 길이는 4마일 정도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도 6마일, 9.6km가 최고인 상태였다. 크로커의 제안은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듀란트는 1만 달러는 자기 돈이라며 내기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CP의 공사장에는,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처럼 비장한 각오로 노동자들이 출발선에 대기했다. UP의 기관장 닷지와 부사장 듀란트 등 UP의 경영진들도 이 흥미로운 대결을 보기 위해 현장에 자리를 잡았다. 3000명이 넘는 중국인, 유럽 각지에서 온 이민자들, 멕시코계, 아메리카 원주민도 두세 명이 끼어 있었는데 모두 출발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7 15, 해가 뜨는 것으로 일이 시작됐다. 현장을 취재한 <샌프란시스코 불리틴즈> 통신원에 의하면 8분 만에 폭풍소리를 내며, 철도 부설 자재를 실은 첫 번째 그룹에 속한 16대의 마차를 비웠다고 한다.

이미 최고의 숙련공이 되어 있던 CP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쳤다. 침목을 가득 실은 마차들은 노동자보다 한 발 앞서 달리면서 땅 위에 자재를 내려놨고, 이것들을 중국인 노동자들이 노반 위에 정렬시켰다. 침목을 내려놓은 마차 뒤에는 레일을 운반하는 마차가 긴 철제 레일을 내려놓는데, 레일 하나의 길이는 약 9미터, 무게는 254킬로그램 정도였다. 이 레일들을 네 명의 노동자가 연장을 이용해 들어 올린 뒤 "아래로"라는 소리가 나면 침목 위에 내려놓는다. 궤도 간격을 맞추는 게이지와 수평을 재는 막대를 든 노동자가 레일의 위치를 정하면 해머를 든 노동자들은 대못을 박는다. 선로 고정에 필요한 대못과 볼트 등은 이미 선발대가 길을 따라 뿌려놓았다. 침목에 고정된 레일을 곧게 펴고 자갈을 뿌리고 이것을 다시 다져주는 작업이 순서대로 이루어졌다. 선로 옆에는 전신주 작업팀이 선로와 보조를 맞춰 나무기둥을 세우고 전선을 이었다.

2마일(3.2km)에 걸쳐 늘어선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은 잘 짜인 각본에 따라 집단 체조나 매스게임을 하는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작업을 벌여나갔다. 노동자들이 선로를 놓으면서 앞으로 나갔고, 자재와 연장을 실은 마차는 그보다 앞서서 나아갔다.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의 목을 축이기 위해 양쪽 어깨에 물과 중국차가 담긴 양동이를 짊어진 노동자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오전 1 30, 점심시간을 알리는 호각소리가 들렸을 때 이미 6마일의 선로가 놓였고 흥이 난 노동자들은 내기의 승리를 확신했다. 오후 작업은 또 다른 팀이 맡아서 하기로 했는데 자부심에 넘친 오전의 노동자들이 내친김에 오후 작업까지 해치우겠다고 나섰다. 점심시간이 끝나자마자 바로 '철의 진군'을 시작했다. 저녁 7시 작업이 종료되었고 새벽에 시작한 지점으로부터 10마일 56피트, 16.1km에 이르는 철도를 부설했다. 이날을 10마일의 날이라고 부르는데 조직된 노동자들이 의지로 하나가 될 때 놀라운 성과를 낸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동쪽서 온 기차와 서쪽에서 온 기차가 입을 맞췄다

1869 5 10일 드디어 미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가 완공되었다. 유타주 포트몬트리 언덕 위에는 동서 양쪽에서 전진해온 선로가 연결되었다. CP UP의 노동자들, 스탠포드를 포함한 "4'로 일컬어지는 CP의 경영진, 완공식 참석을 위해 달려오다가 체불임금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납치·감금되었다가 임금 지급 각서를 써주고 풀려난 UP의 부사장 듀란트와 기관장 닷지를 비롯한 정계, 재계와 언론사 기자들이 역사적인 개통을 보기 위해 모였다. 오후 1시로 예정된 완공식 행사를 두고, 시작 전부터 CP UP의 경영진들이 대립을 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설전이 오갔다. 행사의 하이라이트이자 두 철도의 연결을 상징하는 마지막 퍼포먼스인 골든 스파이크를 누가 박을 것인지를 놓고 두 회사가 양보 없는 싸움을 했기 때문이다. 스탠포드는 "CP UP보다 먼저 주식회사가 되었으니 내가 마지막을 장식해야 한다"고 했고 닷지는 "UP의 철도가 더 길기 때문에 듀란트가 골든 스파이크를 박아야 한다"고 맞섰다. 긴 싸움 끝에 골든 스파이크 박기는 스탠포드의 몫이 된다.

두 철도의 연결을 완결 짓는 예식이 시작되었다. 중국인 노동자들이 레일 한 가닥을 들었다. 아일랜드 노동자들도 한 가닥을 들었다. 동쪽과 서쪽에서 온 두 철로의 마지막 구간에 놓았다. 두 선로가 맞닿은 지점의 침목 위로 듀란트가 골든 스파이크를 살짝 박았다. 이어서 스탠포드가 해머를 내리치면, 골든 스파이크가 완전히 박히면서 대륙횡단철도 완공 소식이 미국 전역에 타전될 상황이었다. 스탠포드는 힘껏 해머를 들어 골든 스파이크의 머리를 향해 가격했다. 꽝 소리와 함께 대륙횡단 철도 완공소식이 전신을 탔다. 그러나 스탠포드의 해머는 골든 스파이크가 아닌 레일을 맞혔다. 재차, 삼차 시도 끝에 골든 스파이크가 박히자 참석자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샴폐인을 터뜨렸다. 선로 양쪽에 대기하고 있던 기관차 두 대가 기적을 울리며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달려온 CP의 쥬피터호와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려온 UP NO.119호 증기기관차가 점점 가까이 붙더니 가볍게 입을 맞췄고 사람들은 더 큰 함성으로 둘의 만남을 환영했다. 입을 맞췄던 주피터 호와 119호는 다시 후진, 각각 객차를 연결했다. 먼저 119호가 객차를 연결한 채로 앞서 키스를 나누었던 지점을 넘어갔다 돌아왔다. 상대방의 지역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쥬피터 호도 객차를 물고 UP가 놓은 선로 위로 들어갔다가 후진해 돌아왔다. 1862년 태평양 철도법이 마련되며 본격화된 대륙횡단철도가, 숱한 우여곡절 끝에 결국 미국을 하나로 묶었다. 남북전쟁으로 분열의 상처를 앓고 있던 미 연방은 철도를 통해 서서히 회복의 길로 나아갔다.

대륙횡단철도가 완공된 이후 이 노선과 연결되는 지선들이 앞다투어 건설됐다. 미국은 세계최고의 철도 나라가 되었다. 주정부와 연방정부는 적극적으로 철도 건설을 보조했다. 철도회사들은 사기업이었지만 철도 산업은 사실상 공공사업으로 진행되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철도로 여겨지는 노선들은 겉모양이 비록 민간회사의 옷을 입었을지라도 국가의 지원을 기초로 하고 있다. 횡단철도는 미국 발전의 커다란 동력이 되었다. 목숨을 걸고 수개월을 걸쳐 지나야 했던 길인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일주일이면 주파할 수 있게 되자, 미 대륙은 이전과는 상상할 수 없는 신세계로 나아갔다.

대륙횡단철도는 미국 산업의 지형도 바꿔 놓았다. 태평양철도법에 따라 횡단철도에 쓰이는 철강은 미국산만 쓸 수 있게 됐는데, 이에 힘입어 철강 산업이 대약진을 하게 된다. 피츠버그에서 작은 제철소를 운영하던 앤드류 카네기는 탄광을 매입하고 철광석 운반선단을 운영하면서 몸집을 불리더니 철도 회사를 인수하기 시작했다. 철도 덕에 가난한 스코틀랜드 이민자 출신 인사가 미국의 강철왕으로 거듭났다. 철강회사들만 혜택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금융 자본도 기지개를 켰다. J.P 모건은 카네기로부터 철강회사를 사들이고 다른 철강 기업들을 합병, US철강회사를 설립했는데 당시 미국 강철 생산량의 3분의 2를 장악했다. 모건은 산업자본가가 아니라 은행가였다. 주식회사가 등장한 후 주식의 매입과 인수, 합병 등에 참여하면서 금융이 산업 자본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은행이 감당하고 있는 자금과 신용으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게 되는데, 사실상 불로소득인 수수료나 고율의 이자, 채권을 이용한 수입 확대 등이 그것이었다.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말했던 생산 과정 외부에 존재하며, 훨씬 보편적이고 구속되지 않는 범주의 수익을 챙기면서 성장하는 거대 기업들이 나타났다.

철도망이 자리를 잡으면서 이를 활용한 기업들이 승승장구했다.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꽃을 피운 '검은 황금', 석유를 장악한 스탠더드오일(Standare Oil)의 확장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스탠더드오일 사장 록펠러는 닥치는 대로 정유회사를 사들였다. 필라델피아, 피츠버그, 뉴욕, 볼티모어, 클리블랜드 등 동부 도망으로 연결된 지역들의 정유공장 대부분을 사들였다. 정유회사들을 장악한 록펠러는 수평적 확대를 넘어 수직적 통합에 나섰다. 정유회사를 정점으로 화물차량, 창고, 송유관 사업뿐만 아니라 석유통 제조 사업까지 뛰어들었다. 판매망까지 수직 계열화를 이룬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은 미국 석유 산업계의 막강한 지배력을 가진 독점자본이 되었다.

대륙횡단철도가 만든 스탠포드 대학교

흔히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활성화하는 주요 동인은 경쟁이라고 한다. 치열한 경쟁이 생산성을 높여주고, 그 힘으로 시장경제가 나날이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장에서 우위를 점한 자본가나 기업들은 독점의 단 열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석유 재벌 록펠러조차 살인적인 경쟁이야말로 현대 경제에 있어 최악의 저주라고 생각했다. 시장에서 독점적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한 기업 형태들은 카르텔, 트러스트, 지주회사 형태로 진화하는데 최초의 카르텔은 미국철도연합이었다.

철도회사들은 시장을 나누어 지배하고 불필요한 경쟁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운임을 통일했다. 하지만 철도회사 간 내부 담합은 오래가지 못하고 자주 깨졌다. 새로운 기업지배방식이 필요했다. 은행가 모건이 나서 트러스트 모델을 세웠는데 개별 주식회사의 주주는 트러스트에서 배당을 받는 조건으로 소규모 수탁 집단에 주식을 신탁했다. 주식을 수탁 받은 소수의 금융자본이 다수의 기업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자본가들이 소수의 지분으로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길도 열렸다. 트러스트는 지주회사를 통해 완성되었다. 록펠러가 스탠더드오일을 통해 최초로 선보였는데, 뉴저지주가 주법 개정을 통해 기업 매매를 가능하게 하자 바로 자신의 회사를 뉴저지주로 옮기고 지주회사를 설립했다. 록펠러가 세운 지주회사는 트러스트들의 주식들을 매입해 소유권을 갖고, 산하 기업들을 중앙집중형으로 관리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마지막 장을 장식한 것은 양극화다. 이미 19세기 말에 미국 내 기업 1%가 제조업의 33%를 통제하게 되었다.

대륙횡단철도 건설은 미국의 위대한 초기 개척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지만 자본과 국가, 정치권력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도 잘 보여준다. 모두 한통속이 되어 부정부패와 이권쟁탈의 거대한 용광로가 됐던 횡단철도는 새로운 제국, 미국을 일으켜 세웠다. 연방정부로부터 무상으로 불하받은 토지를 엄청난 시세차익을 남기며 팔아 막대한 돈을 번 CP의 사장 릴런드 스탠퍼드는 외아들이 장티프스에 걸려 죽는 비극을 겪는다. 1891년 스탠퍼드는 자신이 소유한 캘리포니아의 거대한 부동산 부지에 대학을 설립한다. 대학 이름은 자신의 아들 이름을 딴 릴랜드 스탠퍼드 주니어 대학(Leland Stanford Junior University)으로, 스탠퍼드 대학이라고 알려진 서부 최고의 명문 대학이다. 스탠퍼드가 CP의 출발지 캘리포니아의 젊은이들을, 죽은 아들 대신 모두 아들로 삼겠다며 만든 대학이다. 대륙횡단철도가 만든 대학을 나온 젊은이들은 구글, 야후, 휴렛 팩커드, 나이키 등 미국의 굵직한 회사를 창업해 스탠퍼드의 명성을 드높이고 있다.

조선인 유길준, 미국 대륙횡단열차 탄 소감은?

한국 사람 중에서 미국 대륙횡단 철도를 처음 탔던 이는 유길준이었다. 1882년 조선과 미국 사이에 조미통상수호조약이 체결된 후 미국공사 푸트(Foot, L.H.)가 조선을 방문했는데, 조정은 이에 대한 답례로 1883 9월 전권대신 민영익을 대표로 하는 보빙사(報聘事)라는 이름의 미국사절단을 보낸다. 유길준은 이미 1881년 시찰단으로 일본을 다녀온 뒤였다. 일본을 방문했던 유길준은 다른 일행이 조선으로 귀국할 때 돌아오지 않고 일본에 남았다.

26세의 젊은 청년 유길준의 눈에 비친 일본은 충격 그 자체였다. 관료들의 부패가 판을 치고 양반 귀족들이 백성들의 피를 뽑아먹고 있는 조선이 항로를 잃은 채 난파된 배였다면, 일본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등 메이지유신을 통해 막 기지개를 켜는 거인이었다. 한양의 사대문 안조차도 비만 오면 진창이 되어 제대로 걸을 수 없던 시절에, 도쿄의 시나가와에서 요코하마로 가는 기차를 본 유길준은 두 나라의 차이를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유길준은 일본이 급부상한 것이 지난 30여 년간 서양의 발달된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유길준은 일본에서 근대화의 기틀을 닦은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나고 그의 문하생으로 유학 생활을 시작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인물이다. 미국과 유럽의 문물을 답사하고 자유주의와 공리주의, 부국강병을 내세우며 일본의 개화와 서구화를 이끌었다. 오늘날 1만 엔짜리 지폐 초상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하생이 되어 일본에 머물던 유길준이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임오군란 때문이었다. 정치적 격변으로 혼란에 빠진 후원자 민영익의 요청으로 급히 현해탄을 건너왔다. 고종의 왕비인 민 씨의 후광으로 승승장구한 민영익은 유길준에 대한 신뢰가 남달랐다. 민영익은 일본 시찰단으로 가게 되면서 수행원으로 유길준을 선정했는데, 사정이 생겨 갈 수 없게 되자 고종을 설득해 다른 시찰단원인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끼워 넣었다. 민영익은 조선을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새로운 문물을 봐야 한다고 고종을 설득했다.

유길준이 1883년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에 갈 때는 자신의 절친이자 후원자인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배를 탔다. 미국으로 보내는 최초의 외교사절 보빙사의 대표는 24세의 전권대신 민영익이었다. 부사로 홍영식, 서기관 서광범, 수행원으로 유길준이 긴 여정을 나서는데 이 보빙사가 유길준의 일행으로 알려진 것은 그가 기록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유길준은 미국을 비롯해 자신이 방문한 나라들을 보고 느낀 것을 기록했다. <서유견문>은 그 결과물이었다. 유교적 가치관이 몸에 익은 삶, 왕에 대한 충성심, 외세 앞에 흔들리는 조정, 서양의 자유주의 사상과 합리론, 눈부신 과학기술, 도탄에 빠져 허덕이는 조선 백성 등 격변의 시대 유길준의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을 것이다.

1883 7월 제물포항을 떠난 유길준은 나가사키와 도쿄를 거쳐 9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미국 대통령이 있는 워싱턴에 가기 위해서는 대륙횡단철도를 타야만 했다. 28세의 젊은 외교사절은 광활한 대륙을 횡단하는 열차 안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유길준은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는 CP의 열차를 탔다. 열차에 탄 사람들은 갓에 도포를 쓴 이상한 복색의 아시아계 승객들을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지켜보았다고 한다. 유길준은 외교사절단의 예우에 맞게 고급 객실에 탄 것이 분명하다. <서유견문>에 기록된 유길준의 글은 정확히 호화로운 객차의 대명사인 풀먼 객차를 묘사하고 있다.

"기차는 증기기관의 힘을 빌려서 움직이는 차인데, 화륜차라고도 한다. 앞차 한 량에다 증기 기계를 장치하여 기관차라 이름하고, 기관차 한 량으로 다른 차 20, 30량 내지 40, 50량을 끈다. 기차가 달리기 위하여 길을 닦은 뒤에, 두 줄의 철선을 깔아 그 이름을 철로라고 한다. 철로를 가설하는 재료는 철선과 침목이다. 철선의 너비는 2촌이고 두께도 4촌에 지나지 않지만…(중략)…철로를 까는 비용은 지형이 험한지 평평한지에 따라 같지 않지만, 대략 평균 수치로 우리나라 1리 되는 거리에 3000원이 든다.

멀리 가는 차는 밤낮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차 안에다 침구를 갖춰 놓았는데, 낮에는 걷어서 차벽에 걸어두고, 밤에는 내려서 평상처럼 된 상하 2층의 침대를 만든다. 또 음식차가 있어서 하루 세 끼를 제공하고, 세면실과 변소의 위치도 조리 있게 배치되어서 아주 편리하다. 철로와 차바퀴가 서로 맞물린 제도가 일정한 규모로 뻗어나가, 1만 리 밖까지 이르러도 조그만 오차가 없다." (<서유견문> )

유길준 일행이 탄,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고로 향하는 대륙횡단열차 안에는 이 일행에 호기심을 보이고 접근한 사람이 있었다. 유길준 일행과 3일간 여정을 함께했던 미국 감리교 목사 가우처(John F. Goucher)였다. 해외 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가우처는 조선이라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나라에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고는 이 미개한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가우처는 일본에 선교사로 나가 있는 맥클레이(Robert McLay)에게 조선 선교 가능성을 타진했고, 맥클레이는 주미공사 푸트의 도움을 받아 1884 6월 조선에 들어와 2주간 둘러본다. 쇄국정책과 천주교 박해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조선이었다.

맥클레이는 직접적인 선교보다 의료나 교육을 통한 간접적인 방식으로 기독교를 자리잡게 한다. 맥클레이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 다음해 감리교의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와 장로교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가 들어와 기독교의 뿌리를 내린다. 아펜젤러는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하고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세웠다. 언더우드는 연희전문학교와 새문안 교회로 알려진 정동교회를 세웠는데 한국 역사상 첫 개신교 교회였다. 미국 대륙횡단열차에서 시작된 개신교의 한국 선교는 대한민국이 세계 최대의 신도 수를 갖는 대형 교회를 보유하는 성과를 이루는 씨앗이 되었다. 미국의 정신과 결합한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은 한국 교회를 친미 반공의 보루가 되게 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친미 반공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이었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는 늘 부와 권력이라는 태양궤도 가까이에 붙어 도는 행성이 되었다.

몰락 왕국의 젊은이 유길준의 삶

19세기 말 몰락해가는 왕국의 젊은이가 본 미국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유길준은 시찰단으로 갔다가 일본에 남은 것처럼, 보빙사가 미국 일정을 마치고 귀국할 때 미국에 홀로 남았다. 네 살 아래의 친구이자 전권대신 민영익의 부탁도 있었을 것이었지만 미국에 남아 더 배워야겠다는 유길준의 욕심도 있었다. 유길준은 메사추세츠주 셀럼시 피바디 박물관 관장이었던 모스(Edward Sylvester Morse) 박사의 지도를 받게 된다. 외교사절단에서 한국인 최초의 미국 유학생으로 신분이 바뀌게 된다. 조선의 관리이면서 미국 유학생이었던 유길준은 여러모로 고독한 시간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한말 한국인의 멕시코 이주 역사를 배경으로 삼은 김영하의 소설 <검은 꽃>에는 조선 정부가 보내준 돈이 부족해 고민하는 유길준의 모습이 나온다. 지금이야 미국이나 유럽의 사정에 훤하지만 19세기 말은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정보가 없던 시절이다. 조선정부가 이역만리 단신으로 남겨진 하급 관리에게 충분한 배려를 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의 조정은 자신들의 앞가림을 하기에도 벅찼다. 유길준의 미국 유학시절 사진을 보자. 서양식 헤어스타일에 약간은 비뚤어진 나비넥타이를 멨다. 눈은 깊은 우수에 잠겨 있다. 굶주린 형제들을 집에 둔 채 혼자서만 부자의 잔치 집에 초대된 듯한 표정이다.

구글 검색을 해보면 유길준의 학력은 보스턴 대학 1년 중퇴로 나온다. 유길준은 왜 미국 유학을 접어야 했을까? 일본 유학 생활을 임오군란으로 중단해야 했던 것처럼, 미국 생활은 갑신정변 때문에 이어갈 수 없었다. 1884년 겨울, 미국의 친구들이 유길준에게 신문을 보여주고 "네 나라에서 난리가 났다"며 정변이 일어났음을 알려주었다. 정변은 미국의 국비 유학생이 더 이상 학업을 할 수 없는 것을 의미했다. 혼란이 끊이지 않았던 나라의 젊은이는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면서도 바로 귀국길에 오르지 않고 대서양을 횡단하는 증기선에 올랐다. 기내식을 먹으며 열네 시간 남짓 비행을 하면 귀국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정변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한다 해도 한 달 이상 걸리는 여정을 감안하면 이미 정변의 긴장이 사라진 조국에 발을 내딛게 된다.

내친김에 서양세계를 둘러보게 되었고 아일랜드,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포르투갈과 수에즈운하를 지나 싱가포르, 홍콩을 거치는 대장정을 수행한다. 1885년 귀국하자마자 개화파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체포된 유길준은 우포도청에 수감되었다가 두 달이 지나서 풀려난다. 이후에는 우포도청장 한규설의 집에 연금되었다. 유길준을 한규설의 집에 연금한 이유는 수구파의 살해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연금생활 2년이 지나 백록동 취운정으로 유폐된 유길준은 본격적으로 <서유견문>을 집필하기 시작해 1889년 원고를 완성하고 1890년 한규설을 통해 고종에게 바쳤다.

유길준이 부국강병을 외치며 국민경제회를 조직하는 데 힘을 쏟고 국내산업자본의 육성을 위해 노력한 이유는, 자신이 보고 온 서양을 쫓아가려면 오직 국력 양성밖에 없다고 본 결과였다. 특히 1905년 호남철도회사를 통해 철도 부설권을 확보하려 했던 것은 미국 대륙횡단열차를 비롯한 철도가 만들어낸 신세계를 보았기 때문이다.

해외 유학파는 자신이 공부한 나라에 친화적인 인물이 된다. 일본 유학파는 일본에 우호적이고 미국 유학파들은 미국에 경도된다. 그러나 일본 유학파의 일원으로 일본 근대사상의 대부인 후쿠자와 유키치를 사사했음에도 적극적인 친일파가 되지는 않았다. 1892년에는 미국인 페인이 단돈 14만 원에 조정으로부터 전기 가설권을 사들이려고 했다. 영문을 해독할 자가 없어 유기륜이라는 자가 책임을 맡았는데 유길준이 나서서 나라의 보물과도 같은 것을 단돈 14만 원에 넘길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권 침탈을 막았다.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을 반대했고 고종의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1907년 이완용이 주도한 정미7조약도 반대했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제 병합하고 조선귀족령에 의해 유길준에게 남작 작위를 부여했으나 거부하고 반환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유길준이 민족의 장래를 밝힌 선각자는 아니었다. 을사조약엔 반대했지만, 개혁에 실패하고 당쟁만 일삼은 조선이 당연히 받는 징벌이라 여겼다. 하루가 다르게 천지가 개벽하는 세상을 두 눈으로 보고 온 유길준은 자신이 두 발을 딛고 선 조선의 현실이 암담할수록 시니컬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유길준은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세계관을 가졌고 이런 시각은 국가주의나 군국주의로 흐르거나 쉽게 자포자기하거나, 양극단을 오가게 된다. 민영익의 후견을 받는 등 민 씨 가문의 혜택을 받기도 하였지만 나중에는 대원군 편에 섰다. 황후 민씨를 마리 앙투아네트에 비교하며 암살에까지 관여한다. 안중근이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전국적인 추도회를 열었던 사람이자, 한일합방에 반대하고 국채보상금 처리회장의 역할도 맡았던 유길준의 행적은 혼란의 시대를 닮아 있다.

How to Get a Job at Google - Thomas L Friedman

How to Get a Job at Google
Feb 22, 2014, Thomas L Friedman,
http://www.nytimes.com/2014/02/23/opinion/sunday/friedman-how-to-get-a-job-at-google.html?rref=opinion&module=ArrowsNav&contentCollection=Opinion&action=click&region=FixedLeft&pgtype=article

MOUNTAIN VIEW, Calif. — LAST June, in an interview with Adam Bryant of The Times, Laszlo Bock, the senior vice president of people operations for Google — i.e., the guy in charge of hiring for one of the world’s most successful companies — noted that Google had determined that “G.P.A.’s are worthless as a criteria for hiring, and test scores are worthless. ... We found that they don’t predict anything.” He also noted that the “proportion of people without any college education at Google has increased over time” — now as high as 14 percent on some teams. At a time when many people are asking, “How’s my kid gonna get a job?” I thought it would be useful to visit Google and hear how Bock would answer.

Don’t get him wrong, Bock begins, “Good grades certainly don’t hurt.” Many jobs at Google require math, computing and coding skills, so if your good grades truly reflect skills in those areas that you can apply, it would be an advantage. But Google has its eyes on much more.

“There are five hiring attributes we have across the company,” explained Bock. “If it’s a technical role, we assess your coding ability, and half the roles in the company are technical roles. For every job, though, the No. 1 thing we look for is general cognitive ability, and it’s not I.Q. It’s learning ability. It’s the ability to process on the fly. It’s the ability to pull together disparate bits of information. We assess that using structured behavioral interviews that we validate to make sure they’re predictive.”

The second, he added, “is leadership — in particular emergent leadership as opposed to traditional leadership. Traditional leadership is, were you president of the chess club? Were you vice president of sales? How quickly did you get there? We don’t care. What we care about is, when faced with a problem and you’re a member of a team, do you, at the appropriate time, step in and lead. And just as critically, do you step back and stop leading, do you let someone else? Because what’s critical to be an effective leader in this environment is you have to be willing to relinquish power.”

What else? Humility and ownership. “It’s feeling the sense of responsibility, the sense of ownership, to step in,” he said, to try to solve any problem — and the humility to step back and embrace the better ideas of others. “Your end goal,” explained Bock, “is what can we do together to problem-solve. I’ve contributed my piece, and then I step back.”

And it is not just humility in creating space for others to contribute, says Bock, it’s “intellectual humility. Without humility, you are unable to learn.” It is why research shows that many graduates from hotshot business schools plateau. “Successful bright people rarely experience failure, and so they don’t learn how to learn from that failure,” said Bock.

“They, instead, commit the fundamental attribution error, which is if something good happens, it’s because I’m a genius. If something bad happens, it’s because someone’s an idiot or I didn’t get the resources or the market moved. ... What we’ve seen is that the people who are the most successful here, who we want to hire, will have a fierce position. They’ll argue like hell. They’ll be zealots about their point of view. But then you say, ‘here’s a new fact,’ and they’ll go, ‘Oh, well, that changes things; you’re right.’ ” You need a big ego and small ego in the same person at the same time.

The least important attribute they look for is “expertise.” Said Bock: “If you take somebody who has high cognitive ability, is innately curious, willing to learn and has emergent leadership skills, and you hire them as an H.R. person or finance person, and they have no content knowledge, and you compare them with someone who’s been doing just one thing and is a world expert, the expert will go: ‘I’ve seen this 100 times before; here’s what you do.’ ” Most of the time the nonexpert will come up with the same answer, added Bock, “because most of the time it’s not that hard.” Sure, once in a while they will mess it up, he said, but once in a while they’ll also come up with an answer that is totally new. And there is huge value in that.

To sum up Bock’s approach to hiring: Talent can come in so many different forms and be built in so many nontraditional ways today, hiring officers have to be alive to every one — besides brand-name colleges. Because “when you look at people who don’t go to school and make their way in the world, those are exceptional human beings. And we should do everything we can to find those people.” Too many colleges, he added, “don’t deliver on what they promise. You generate a ton of debt, you don’t learn the most useful things for your life. It’s [just] an extended adolescence.”


Google attracts so much talent it can afford to look beyond traditional metrics, like G.P.A. For most young people, though, going to college and doing well is still the best way to master the tools needed for many careers. But Bock is saying something important to them, too: Beware. Your degree is not a proxy for your ability to do any job. The world only cares about — and pays off on — what you can do with what you know (and it doesn’t care how you learned it). And in an age when innovation is increasingly a group endeavor, it also cares about a lot of soft skills — leadership, humility, collaboration, adaptability and loving to learn and re-learn. This will be true no matter where you go to work.

김연아 Yuna kim 2014 Sochi Gala. 갈라쇼 마친 김연아 "판정에 억울하지도 속상하지도 않아"





[소치2014]갈라쇼 마친 김연아 "판정에 억울하지도 속상하지도 않아"
김수경  2014.02.23 06:17 | 수정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2/23/2014022300437.html?news_top

2014 소치동계올림픽 피겨 갈라쇼를 마지막으로 은반 위를 떠나는 '피겨여왕' 김연아(24)가 판정 논란에 대해 입을 열었다.

김연아는 지난 21일과 22일 러시아 소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에서 열린 여자 싱글 피겨스케이팅 종목에 출전해 `어릿광대를 보내주오` `아디오스 노니노` 음악에 맞춰 무결점 연기를 펼쳤다.

김연아가 완벽한 연기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실수를 저지른 올림픽 개최국인 러시아 선수 아델리나 소트니코바(18)가 금메달을 차지하자 국내외 전문가와 팬들은 개최국에 유리한 결과라며 판정을 거세게 비판하고 나섰다.

하지만 김연아는 성숙했다. 갈라쇼가 끝난 뒤 인터뷰에서 그는 판정논란에 대해 “억울함이나 속상함도 전혀 없다”며 “믿어도 된다”고 말했다.

시상식 후 흘린 눈물에 대해서도 “억울함이나 속상함 때문이 아니다. 이 말은 정말로 믿어도 된다. 그동안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맺혀온 것이 한 번에 터져서 흘린 눈물이었다”고 말했다.

김연아가 갈라쇼에서 선택한 음악은 비틀스의 멤버 존 레논이 작곡한 곡을 에이블릴 라빈이 부른 ‘이매진(Imagine)’이다. 그는 “처음 갈라 프로그램을 선택할 때 많은 아이디어가 있었다. ‘이매진’은 안무가가 5~6년 전에 제의한 곡인데 이번에 선보이게 됐다”고 선곡 이유를 밝혔다.

하늘색 그라데이션 의상을 입은 김연아는 ‘모두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상상하라’는 구절에서 살코 점프를 뛰어 가사에 힘을 실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는 구절에서는 집게손가락을 들어보여 메시지를 확실히 전달하기도 하고 ‘세상이 하나가 되길 바란다’는 구절에서 두 팔로 끌어안는 동작을 했다.


전 세계가 바라보는 무대에서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한 여왕은 은반에 완전히 작별을 고했다.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한겨레 | 입력 2014.01.04 09:40 | 수정 2014.01.05 10:30    이진순  언론학 박사, 희망제작소 부소장,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하다가 사직하고 귀국해 시민운동 현장에 합류했다. 경험과 논리에 갇히지 않고 즐겁게 소통하고 진화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여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한겨레]'거부'였지만 유신시절 '양심세력의 보루'였던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아비들도 처음부터 썩지는 않았다…노인 세대를 절대로 봐주지 마라"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며칠씩 신문을 보기 싫을 때가 있다. 상쾌한 표정으로 조간신문을 펼쳐 드는 건 신문사 광고에나 나오는 장면이다. 신문을 펼치는 게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만큼 불길한 나날들, 불빛도 없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어른을 만나고 싶었다. 채현국 선생을 만나면 "어른에 대한 갈증"이 조금 해소될 수 있을까. 격동의 시대에 휘둘리지 않고 세속의 욕망에 영혼을 팔지 않은 어른이라면 따끔한 회초리든 날 선 질책이든 달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채현국 선생에 대한 기록은 변변한 게 없다. 출생연도 미상. 대구 사람. 서울대 철학과 졸. 부친인 채기엽과 함께 강원도 삼척시 도계에서 흥국탄광을 운영하며 한때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거부였던 그는 유신 시절 쫓기고 핍박받는 민주화 인사들의 마지막 보루였다. 언론인 임재경의 회고에 따르면 채현국은 <창작과 비평>의 운영비가 바닥날 때마다 뒤를 봐준 후원자였으며 셋방살이하는 해직기자들에게 집을 사준 "파격의 인간"이다. 김지하, 황석영, 고은 등 유신 시절 수배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여러 민주화운동 단체에 자금을 댄 익명의 운동가, 지금은 경남 양산에서 개운중, 효암고를 운영하는 학원 이사장이지만 대개는 작업복 차림으로 학교 정원일이나 하고 있어 학생들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했다.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하던 채현국 선생을 지난 1223일 조계사 찻집에서 어렵사리 대면했다. 검은 베레모에 수수한 옷차림, 등에 멘 배낭은 책이 가득 들어 묵직했다. 노구의 채현국은 우리 일행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깍듯이 존대를 했다.

"독지가라 쓰지 말라"는 인터뷰 조건

-왜 그렇게 인터뷰를 마다하시나?

"내가 탄광을 한 사람인데….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죽었다. 난 칭찬받는 일이나 이름나는 일에 끼면 안 된다."

-탄광사고는 다른 탄광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그게 결국은 내 책임이지. 자연재해도 아니고…."

흥국탄광이 설립된 것이 1953. 열일곱 살 때부터 채현국은 서울에서 연탄공장을 하며 부친의 일을 돕기 시작했고 10여 년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도계에 내려가 73년까지 회사를 운영했다.

-젊어서는 큰 기업가였고 현재 학원 이사장인데, 어르신 70 평생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평전이나 자전에세이 같은 것도 없고.

"절대 쓰지 않을 거다. 주변 사람들한테도 부탁했다. 쓰다 보면 좋게 쓸 거 아닌가. 그거 뻔뻔한 일이다. 난 칭찬받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죄송하지만 연세도 잘 모르겠다. 몇 년도 생이신가?

"호적에는 1937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35년생이다. 올해 일흔아홉."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이 쓴 글에 보면 "채현국은 거리의 철학자, 당대의 기인, 살아있는 천상병"이라는 대목이 있다.

"하하하… 거지란 소리지."

-어쨌든 주류 모범생은 아니신 듯하다.(웃음)

"근데 시험을 잘 치니까 내가 모범생으로 취급되고. '저러다 언젠간 출세할 거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10여 년 전부터 내게 성을 내는 친구들이 있다. '이 새끼, 출세하고 권력 가질 줄 알았는데 속았다'고….(웃음)"

-출세는 안 하신 건가, 못 하신 건가?

"권력하고 돈이란 게 다 마약이라…. 지식도 마찬가지고. 지식이 많으면 돈하고 권력을 만들어 내니까…."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채현국 선생과의 인터뷰는 긴 실랑이 끝에 몇 가지 약속을 전제로 성사되었다. "절대로 자선사업가, 독지가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것" "미화하지 말 것" "누구를 도왔다는 얘기는 하지 말 것."

-도움 받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도운 사실을 숨기나?

"난 도운 적 없다. 도움이란, 남의 일을 할 때 쓰는 말이지. 난 내 몫의, 내 일을 한 거다. 누가 내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는지는 몰라도 나까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일이다."

-왜 안 되나?

"그게 내가 썩는 길이다. 내 일인데 자기 일 아닌 걸 남 위해 했다고 하면, 위선이 된다."

-한때 소득세 10위 안에 드는 거부였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떠신가?

"난 여섯번 부자 되고 일곱번 거지 된 사람이다. 지금은 일곱번짼데 돈 없는 부자다.(웃음) 돈은 없지만 학교 이사장이니까. 개인적으론 가진 거 없다. 보증 불이행으로 지금도 신용불량자다."

-탄광업에선 완전히 손 떼셨나?

"73년도에 탄광 정리해서 종업원들한테 다 분배하고 내가 가진 건 없다."

-어떻게 분배를 했나?

"광부들한테 장학금 주기 시작해서 그 자식들 장학금 주다가 병원 차려서 무료 진료하다가… 마지막에 손 털 때는 광부들이 이후 10년씩 더 일한다 치고 미리 퇴직금을 앞당겨 계산해서 나눠줬다."

-73년이면 오일쇼크로 탄광업이 황금알 낳는 거위였을 텐데 왜 기업을 정리했나?

"경기 좋을 때였다. 근데 72년도에 국회 해산되고 유신 선포되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곤 '이제 더 이상 탄광 할 이유가 없겠다'고 결론 내렸다. 내가 정치인은 아니지만 군사독재 무너뜨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해왔는데…."

-그럴수록 돈을 벌어서 민주화운동을 지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업을 해보니까… 돈 버는 게 정말 위험한 일이더라.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돈 쓰는 재미'보다 몇천배 강한 게 '돈 버는 재미'. 돈 버는 일을 하다 보면 어떻게 하면 돈이 더 벌릴지 자꾸 보인다. 그 매력이 어찌나 강한지, 아무도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어떤 이유로든 사업을 하게 되면 자꾸 끌려드는 거지. 정의고 나발이고, 삶의 목적도 다 부수적이 된다."

-중독이 되는 건가?

"중독이라고 하면, 나쁜 거라는 의식이라도 있지. 이건 중독도 아니고 그냥 '신앙'이 된다. 돈 버는 게 신앙이 되고 권력이, 명예가 신앙이 된다. 그래서 ', 나로서는 더 이상 깜냥이 안 되니, 더 휘말리기 전에 그만둬야지' 생각했다."

-부친이신 채기엽 선생도 중국에서 크게 사업을 일으켜 독립운동가들에게 재정적 도움을 주신 걸로 알고 있다. 큰돈을 만지면서 돈에 초연하기는 부친한테서 배우신 건가?

"우리 아버님도 일제 치하 왜곡된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성공 자체를 그리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부끄러운 시절에 잘산 것이 자랑일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이다. 아버지가 과거 얘기를 나한테 하신 적이 없어서, 내가 아는 것도 다 남한테 드문드문 들은 거다."

대구 부농의 독자였던 부친 채기엽은 교남학원 1기 졸업생으로 시인 이상화 집안과 교분이 깊었다. 이상화의 백형인 이상정 장군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걸 알고 상하이(상해)로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중국에 잔류해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트럭운송업, 제사공장, 위스키공장을 하며 손대는 일마다 크게 성공했다. 독립운동가들을 먹이고 재우고 돈 대준 대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도 46년 귀국할 때는 빈손이었다.

장의사적인 인간과 산파적인 인간

-일제하 지식인 중에 사회주의에 경도된 사람이 많았는데 아버님은 어떠셨나?

"아주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사상이나 이념 그런 거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을 좋아하셨다. 아버님도 나도, 지식이나 사상은 믿지 않는다."

-서울대 철학과까지 나오신 분이 지식을 안 믿는다니?

"지식을 가지면 '잘못된 옳은 소리'를 하기가 쉽다.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는 것'만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평생 그 해답을 찾기도 힘든데, 나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린 '정답'이라니…. 이건 군사독재가 만든 악습이다. 박정희 이전엔 '정답'이란 말을 안 썼다. 모든 '옳다'는 소리에는 반드시 잘못이 있다."

-반드시?

"반드시! 햇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이, 옳은 소리에는 반드시 오류가 있는 법이다."

부친이 큰 사업가였지만 채현국은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라지 못했다. 사업은 부침이 심했고, 부친의 종적이 묘연할 때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가계를 꾸린 적도 적지 않았다. 위로 형이 한 분 계셨는데 휴전되던 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서울대 상대 4학년이던 형은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 "이제 우린 영구분단이다. 잘 살아라…" 한마디뿐이었다. 형의 죽음으로 채현국은 열일곱 살에 집안의 11대 독자가 되었다.

-서울대에 입학해서 연극반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다.

"한 게 아니라 만든 거다. 그때 이순재가 철학과 3학년이고 내가 1학년이었는데 순재더러 '우리 연극반 하나 만들래?' 해서…."

-이순재씨가 선배라면서 왜 반말을 쓰시나?

"나이로는 순재가 나보다 한 살 많은데. 내가 중학 때부터 후배한테는 예대(禮待)하고 선배한테는 반말했다. 나랑 친구 할래, 선배 할래? 물어보고 친구 한다고 하면 반말로…. 후배한테 반말하는 건 왜놈 습관이라, 그게 싫어서 난 후배한테 반말하지 않는다."

-원래 조선 풍습은 후배한테 반말 안 쓰는 건가?

"퇴계는 26살 어린 기대승이랑 논쟁 벌이면서도 반말 안 했다. 형제끼리도 아우한테 '~허게'를 쓰지, ', 쟤…' 하면서 반말은 쓰지 않았다. 하대(下待)는 일본 사람 습관이다."

도계에서 흥국탄광 운영하는
거부였지만 유신 시절 쫓기던
양심세력의 마지막 보루였던
파격, 파격, 파격, 파격의 인간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모든 건 이기면 썩는다
아비들도 처음부터 썩진 않았지
노인세대를 절대 봐주지 마라

-어쨌든 사업하는 집안 자제로 일류대까지 갔는데 왜 연극을 할 생각을 했나?

"교육의 가장 대중적인 형태가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글자를 몰라도 지식이 없어도, 감정적인 형태로 전달이 되고. 지금도 난, 요즘 청년들이 한류, 케이팝 하는 거 엄청난 '대중혁명'이라고 본다. 시시한 일상, 찰나찰나가 예술로 승화되고… 멋진 일이다."

대학 졸업 후 채현국이 선택한 직업은 중앙방송(KBS의 전신) 공채 1기 연출직이었다. 그러나 입사 석달 만에, 박정희를 우상화하는 드라마를 만들라는 지시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마침 흥국탄광도 부도 위기였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360%의 사채를 쓰며 겨우 위기를 막고, 이후 10여 년간 사업에만 전념했다.

-그렇게 고생해서 일군 사업인데, 아깝지 않나?

"아깝지 않다."

-기업을 제대로 키워서 돈을 벌어 좋은 일에 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거 전부 거짓말이다. 꼭 돈을 벌어야 좋은 일 하나? 그건 핑계지. 돈을 가지려면 그걸 가지기 위해 그만큼 한 짓이 있다. 남 줄 거 덜 주고 돈 모으는 것 아닌가."

-기업가가 자기 개인재산을 출연해서 공익재단을 만드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흥분한 어조로) 자기 개인 재산이란 게 어딨나? 다 이 세상 거지. 공산당 얘기가 아니다. 재산은 세상 것이다. 이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서 잘한 것뿐이다. 그럼 세상에 나눠야 해. 그건 자식한테 물려줄 게 아니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닌데, 재단은 무슨…. 더 잘 쓰는 사람한테 그냥 주면 된다."

-그렇게 두루 사회운동가들에게 나눠주셨지만 개중에는 과거 경력을 입신과 출세의 발판으로 삼거나 아예 돌아서서 배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돈이란 게 마술이니까… 이게 사람에게 힘이 될지 해코지가 될지, 사람을 회전시키고 굴복시키고 게으르게 하는 건 아닐지 늘 두려웠다. 그러나 사람이란… 원래 그런 거다. 비겁한 게 '예사'. 흔히 있는, 보통의 일이다. 감옥을 가는 것도 예사롭게, 사람이 비겁해지는 것도 예사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서운하거나 원망스러운 적 없으신가?

"모든 건 이기면 썩는다. 예외는 없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는다. 아비들이 처음부터 썩은 놈은 아니었어, 그놈도 예전엔 아들이었는데 아비 되고 난 다음에 썩는다고…."

-보통 선생 연배에 이른 분들을 뵈면, 4·19에 열렬히 참여하고 독재에 반대했던 분들이 나이 들며 급격히 보수화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의제든 종북이냐 아니냐로 색칠을 해서 다른 모든 가치에 우선시하는데, 이런 세대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하나?

"세상엔 장의사적인 직업과 산파적인 직업이 있다. 갈등이 필요한 세력, 모순이 있어야만 사는 세력이 장의사적인 직업인데, 판사 검사 변호사들은 범죄가 있어야 먹고살고 남의 불행이 있어야 성립하는 직업들 아닌가. 그중에 제일 고약한 게, 갈등이 있어야 설 자리가 생기는 정치가들이다. 이념이고 뭐고 중요하지 않다. 남의 사이가 나빠져야만 말발 서고 화목하면 못 견디는…. 난 그걸 장의사적인 직업이라고 한다."

깨진 돌에 쓰인 "쓴맛이 사는 맛"

-그럼 산파적인 직업은 뭔가?

"시시하게 사는 사람들, 월급 적게 받고 이웃하고 행복하게 살려는 사람들…. 장의사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실제 장의사는 산파적인 사람들인데. 여하튼 갈등을 먹고 사는 장의사적인 사람들이 이런 노인네들을 갈등 속에 불러들여서 이용하는 거다. 아무리 젊어서 날렸어도 늙고 정신력 약해지면 심심한 노인네에 지나지 않는다. 심심한 노인네들을 뭐 힘이라도 있는 것처럼 꾸며 가지고 이용하는 거다. 우리가 원래 좀 부실했는데다가… 부실할 수밖에 없지, 교육받거나 살아온 꼬라지가…. 비겁해야만 목숨을 지킬 수 있었고 야비하게 남의 사정 안 돌봐야만 편하게 살았는데. 이 부실한 사람들, 늙어서 정신력도 시원찮은 이들을 갈등 속에 집어넣으니 저 꼴이 나는 거다."

-젊은 친구들한테 한 말씀 해 달라. 노인세대를 어떻게 봐달라고….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까딱하면 모두 저 꼴 되니 봐주면 안 된다."

-요즘 청년들이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이어가고 있다. 어떻게 보시나?

"아주 고마워! 젊은 사람들 그렇게 하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살아 있어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날조 조작하는 이 언론판에 조종당하지 않고 그렇게 터져 나오니 참 고마워. 역시 젊은 놈들이 믿을 만하구나. 암만 늙은이들이 잘못해도 그 덕에 사는구나 하고…."

-정약용 같은 사람은 죽기 훨씬 전에 자기 비문을 썼다는데, 만일 그런 식으로 선생의 비문을 스스로 쓴다면 뭐라고 하고 싶으신가?

"우리 학교에 가면 '쓴맛이 사는 맛'이라고 돌멩이에 쓰여 있다. 원래 교명을 쓰려고 가져왔는데 한 귀퉁이가 깨져 있었다. 깨진 돌에 교명 쓰는 게 안 좋아서 무슨 다른 말 한마디를 새겨볼까 하다가 그 말이 생각났다. 학생들한테 '이거 어떠냐?' 물었더니 반응이 괜찮더라. 비관론으로 오해하는 놈도 없고."

-그 말이 비관론이 아닌가?

"아니지. 적극적인 긍정론이지. 쓴맛조차도 사는 맛인데…. 오히려 인생이 쓸 때 거기서 삶이 깊어지니까. 그게 다 사람 사는 맛 아닌가."

-그럼 비문에 "쓴맛이 사는 맛이다" 이렇게?

"그렇게만 하면 나더러 위선자라고 할 테니 뒤에 덧붙여야지. '그래도 단맛이 달더라' 하고.(웃음)"

-"쓴맛이 사는 맛이다… 그래도 단맛이 달더라." 뭐가 인생의 단맛이던가?

"사람들과 좋은 마음으로 같이 바라고 그런 마음이 서로 통할 때…. 그땐 참 달다.(웃음)"

당분간은 쓴맛도 견딜 만할 것 같다. 선생과 함께한 시간이 내겐 "꿀맛"이었다.


녹취 김혜영(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